3년 전쯤이다. 경증치매 노인들을 대상으로 그림책을 함께 보며 치유 효과를 노리는 프로그램을 맡아 진행하고 있었다. 프로그램은 재능기부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원활하게 운영되고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런 변고는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었다. 담당자였던 내가 대타로 나서야 하는 상황이었다.
임시로 맡게 된 것이었지만 결코 함부로 진행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책을 통한 인지력 향상, 우울증 감소라는 특별한 목표를 둔 프로그램이었다. 어떤 책으로 진행해야 할 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온종일 고민하던 차에 하늘의 도움이었을까. 마침 이용자가 반납한 책 중에 '할아버지의 바닷속 집'이라는 얇은 그림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시간이 촉박한 만큼 얇은 책이 좋을 것 같았다. 더구나 경증치매노인에게 더없이 알맞아 보이는 그림도 풍부했다. 가볍게 살필 생각으로 책장을 넘기는 순간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라 있었다. 빼어난 흡인력에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한 일본 최고의 그림책'이라는 추천 문구가 무색하지 않았다.
그림책 속의 주인공도 경증치매노인과 같은 또래의 할아버지였다. 바닷물이 점점 차오르는 마을에 홀로 사는 할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가지만, 끝까지 마을을 지킨다는 설정으로 이야기가 시작됐고 희망적인 메시지가 전달되며 끝을 맺는 책이었다.
그렇게 책을 골라 경증치매노인들이 계신 노인복지기관에 찾아가는 날. '할아버지의 바닷속 집'을 읽은 뒤 어르신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그림책 속에서 강한 이미지로 남았던 가족과 함께한 추억을 어르신들은 각자의 입으로 풀어냈다. 가족과 함께 살았던 곳, 가장 많은 추억이 남아있는 곳을 그림처럼 그려냈다. 경증치매노인들과 함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구체적이었다. 무관심하게 지켜보던 어르신들도 동참하기 시작했다. 마법이 시작된 것 같았다.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시골마을에 대해, 자녀들이 함께 살았던 집에 대해 엊그제 있었던 일처럼 이야기했다.
즐거워하는 어르신들의 모습은 그림책에 등장하는 할아버지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마지막 페이지에서 벽 틈으로 피어난 한 송이 민들레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는 것과 같은 표정. 층층이 쌓인 추억을 하나씩 되돌아보며 인생의 즐거움을 찾아가던 경증치매노인들의 모습을 보며 그림책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다시금 느꼈다. 그 순간 나는 '웰다잉'이란 주제로 강연했던 한 교수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살아간다는 것은 곧 죽어가는 것과 똑같은 의미예요. 하지만 어떻게 살아가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죽음'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지고 '온전한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김효창 대구 범어도서관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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