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중기의 필름통] 영화 ‘킹 리차드’

영화 '킹 리차드'의 한 장면.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영화 '킹 리차드'의 한 장면.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누구나 희망을 꿈꾼다. 그러나 그 결실을 따는 것은 쉽지 않다. 가난한 집에서 이웃의 멸시, 동네 깡패들의 방해, 그리고 흑인이라는 인종차별을 견디며 백인의 전유물인 스포츠 종목에서 세계 최고가 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러나 그 기적이 일어났다.

'킹 리차드'(감독 레이날도 마커스 그린)는 이 기적을 일으킨 아버지의 헌신과 믿음을 그린 가족영화이자 스포츠영화이다. 실화를 기반으로 가족의 따뜻한 사랑과 스포츠의 짜릿한 승부를 담았다.

1980년대 테니스는 백인들의 스포츠였다. 좋은 코치에 부모의 재력, 열성적인 교육열이 뒷받침돼야 했다. 두 딸을 테니스의 세계 1위를 꿈꾸던 흑인 아버지가 있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변두리 컴튼에 살고 있는 리처드 윌리엄스(윌 스미스)는 두 딸 비너스(사니야 시드니)와 세레나(데미 싱글턴)를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로 키우기로 마음을 먹는다. 아이들이 태어나기 2년 전부터 그는 78쪽에 이르는 육성계획을 세울 정도로 극성이다. 아버지의 훈련방식으로는 한계를 느껴 유명 코치를 찾아다니지만, 돌아오는 것은 콧방귀뿐이었다.

영화 '킹 리차드'의 한 장면.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영화 '킹 리차드'의 한 장면.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킹 리차드'는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세계 테니스계를 제패한 비너스와 세레나 자매의 이야기를 담았다. 자매는 그랜드슬램 단식 30회 우승, 올림픽 금메달 6개라는 놀라운 성적을 내며 '블랙 프라이드'의 신화가 됐다.

스포츠 영화는 선수의 불굴의 의지와 정신 승리를 그린다. 그러나 이 영화는 아버지를 그린다. 두 딸을 세계적인 선수로 키워낸 아버지 리처드의 확신과 믿음을 중심으로 그려나간다.

"나의 아버지는 나를 지키지 못했지만 난 너희들을 지킬게. 너희들은 세계 최고가 될 거야." 비를 맞으며 훈련하는 바람에 이웃의 학대신고까지 받는다. 불량배들의 접근도 막아내며 밤에는 야간경비까지 서면서 아이들에게 매달린다.

컴튼은 주로 흑인들이 살던 소도시로 1980년대 흑인 갱스터 랩을 탄생시킨 곳이다. 오죽 했으면 랩이 나올 정도였을까. 사람들은 흑인 갱들의 등쌀에 고통 받았고 10대들은 총과 마약에 노출돼 일찍 삶을 포기해야 했다.

최악의 상황이다. 이를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믿음뿐이다. 그래서 영화는 제왕적 믿음과 과도한 강박이란 의미로 아버지의 이름에 '왕'을 달았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돈이나 명예에만 매달린 것은 아니었다. 딸을 소모적인 주니어대회에 참가시키지 않으려는 노력도 그중 하나다. 특히 엄마(언자누 앨리스)의 역할이 컸다. 남편의 오만과 독선이 엿보일 때면 그를 제지시키고 다시 자식들에게 향하도록 했다. 아이들 또한 부모의 헌신을 배신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따뜻한 가족영화의 틀을 유지한다.

영화 '킹 리차드'의 한 장면.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영화 '킹 리차드'의 한 장면.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비너스의 경기 장면은 스포츠영화 특유의 긴장감을 준다. 실제 장면을 TV 화면에 비추면서 관중의 환호와 탄식, 땀과 날숨을 담아냈다. 흥미로운 것은 승리의 순간만을 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비너스의 동생 세레나의 커리어가 더 화려하지만, 영화는 비너스의 등장에 방점을 찍는다. 백인들의 전유물이었던 테니스계에 흑인이 장벽을 허무는 그 위대한 도전에 힘을 실은 것이다.

엄마는 흑인 인권운동가 소저너 트루스(1797~1883)의 유명한 발언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를 딸에게 가르친다. 흑인노예제 시대에 태어나 흑인 페미니즘 사상에 씨앗을 심은 인물이다. 아버지는 KKK단의 폭력을 이겨냈고, 이제 흑인 갱들의 주먹질에 피를 흘리면서도 딸들을 지켜낸다. 시대를 넘어서도 벗어날 수 없었던 굴욕을 희망과 믿음으로 떨쳐낸다. 그래서 '킹 리차드'는 미국의 인종적 갈등과 한계마저 용광로에 넣어 무지개로 만들어내는 상징성까지 담아냈다.

배우 윌 스미스는 가난과 차별을 딛고 희망을 품는 아버지 리처드 윌리엄스의 외로운 투혼을 잘 연기했다. 테니스공을 까만 밤 허공에 날릴 때의 무력감, 딸을 잡고 나는 너를 꼭 지키겠다고 다짐하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 등은 그의 진정성을 잘 느낄 수 있다. 특히 윌 스미스의 코믹한 이미지도 실제 미친 것 같은 리처드 윌리엄스의 허풍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윌 스미스는 다음 주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가장 유력한 남우주연상 후보로 떠오르고 있다. '킹 리차드'는 작품상, 여우조연상 등 6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다.

'킹 리차드'는 가혹한 현실을 인내하며 이겨낸 인간승리의 짜릿함을 잘 느끼게 하는 감동 실화영화다. 24일 개봉. 144분. 12세 관람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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