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영화, 詩그림을 만나다] <6> 모가디슈(2021)

모가디슈서 맞붙은 남북…동고동락 드라마틱하게 그려내
약자 슬픔 외면·글로벌 보편성 무시 아쉬움으로 남아

감독: 류승완

출연: 김윤석, 조인성, 허준호

러닝타임: 121분

1991년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 대한민국 한신성 대사(김윤석)와 안기부 출신 강대진 참사관(조인성)은 당시 북한보다 열세였던 이곳에서 UN가입 총력전을 펼친다. 그러나 시민 시위가 내전으로 번지며 대한민국 대사관은 전기, 식량 등 기본적인 자원부터 이웃나라와의 연락마저 끊긴 상태에 놓인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북한의 림용수 대사(허준호)와 태준기 참사관(구교환) 및 북한 대사관 직원들이 구조를 요청하면서 긴장감이 감도는 동행이 시작된다.

영화 '모가디슈'.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모가디슈'.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모가디슈'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아프리카 탈출 영화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무사히 치른 자긍심이 하늘을 찌르던 시기였지만, 여전히 한국은 UN에도 가입 못한 변방 국가였다. 듣도 보도 못한 아프리카 소국 소말리아의 한 표가 더 없이 소중했던 시절, 남북은 모가디슈에서 맞붙는다. 그러나 모가디슈에 내전이 발발하면서 남북 대사관 직원들은 더 큰 생사의 기로에 놓인다.

'모가디슈'는 코로나19의 미친 격랑 속에서도 360만 명이라는 놀라운 관객을 동원한 영화였다. 류승완 감독의 액션은 긴박감이 넘쳤으며, 한국 관객들의 평점도 상당히 높았다.

'모가디슈'의 이야기는 드라마틱하다. 서로 죽일 듯 으르렁거리던 남과 북의 공관원들이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하는, 잠시나마 하나가 됐던 '단독강화'(單獨講和)는 흔치 않는 이야기다. 동고동락하면서 죽음의 위기를 이겨냈지만 서로 인사도 할 수 없었던 마지막 장면은 특히 얼음처럼 차가운 남북의 현실을 잘 보여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모가디슈'는 다분히 한국적이다. 그렇다면 외국인은 이 영화를 어떻게 보았을까. 미국인 시인 제이크 레빈에게 시 작업을 맡겼다. 그런데 그의 시선은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우리가 남북의 냉전을 볼 때 그는 대중문화의 본질을 이야기하며 이 영화가 가진 편협한 시선을 질타했다.

시 제목부터 '누가 이따위 영화를 가지고 시 같은 걸 쓸 거야?', 상당히 화가 난 듯 보인다. 화가 이영철 또한 이 영화가 주는 불편함을 토로했다. 그는 "공허한 자동차의 질주와 게임처럼 과장된 총질의 시각 파티로 일관한 영화"라고 했다.

'모가디슈'는 류승완 감독의 작품이다. 그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만들면서 한국영화의 흥행을 주도한 감독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오락성에 경도된 느낌을 받는데, '모가디슈'에서는 약한 자들의 슬픔을 오락적 유희, 극적 도구로 사용했고, 작가들이 이를 지적한 것이다.

영화에서 아프리카인들은 치아가 빠져 있고, 돈만 밝힌다. 정부는 부패해 있고 군인과 공무원들은 뇌물을 받는다. 아이들은 총을 가지고 이방인들을 희롱한다. 이런 아프리카에 대한 일관된 묘사는 다분히 상투적이고 인종차별적이다.

아프리카의 눈물은 식민 제국주의가 뿌린 것이다. 소말리아는 이탈리아 식민지배를 받았다. 영화는 그들의 시선을 그대로 옮겨온다. 한국 또한 일제 식민시대와 열강에 의해 찢겨진 분단국가의 아픔을 겪은 나라면서 말이다.

화가 이영철은 약자의 슬픔을 외면하고 관객에게 영합한 영화와 달리, 작가적 시선으로 '모가디슈'를 재창조했다. '불이화(不二花)-Maqdishu 1991'라는 제목의 설치작품은 높이 1m6㎝의 직육면체를 제작한 후 그 위 26㎝ 높이에 기도하는 손을 석고로 떠서 얹은 형태이다.

청색과 적색은 남과 북을 뜻한다. 아래에서 위로는 적색, 위에서 아래로는 청색 물감 흘리기를 통해 끊임없는 대립과 갈등을 묘사했고, 사면에는 1991년을 뜻하는 숫자를 배치했다. 수평으로 흐르는 회색과 황토색 물감은 긴박하게 탈출하는 상황을 속도감 넘치게 표현했다. 크고 작은 점들은 절망과 혼란이 부유(浮遊)하는 모가디슈의 시간이다. 윗면에는 모가디슈의 국기인 청색 바탕의 흰 별을 넣었다.

'Maqdishu'는 모가디슈의 아프리카 표기이다. 영문인 'Mogadishu' 대신 고유명으로 그들의 주체성을 염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아크릴 박스에 놓인 손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여러 손들을 형상화한 것이다. 시위대를 구타하는 폭력의 손, 방아쇠를 당기는 손, 약소국가를 핍박하는 강대국의 욕망의 손, 저항하는 민중의 손, 동포애로 화해하는 손, 구원을 기다리는 기도하는 손….

촛불을 향한 이 손들은 인간애의 들판으로 나아가면 인간은 모두 둘일 수 없는, 하나의 꽃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담고 있다. 그래서 작품명이 '불이화'(不二花)이다. 영화가 주는 이분법적인 진부함을 뛰어넘는 해석이다.

시인 제이크 레빈은 '모가디슈'를 좀비영화라고 비꼬았다. 남과 북의 탈출 드라마가 결국 좀비에게 피해 달아나는 생존 드라마라는 것이다. '좀비 영화 모가디슈 보고 나는 좀비가 되었어. 이제는 뇌가 없어. 좀비 영화 보고 시를 쓸 때 난 좀비 시인이 되지.'

시인은 "나는 한국 형제애에 관한 이 영화가 흑인에 대한 인종적인 고정관념을 만들지 않았나 궁금하다"며 "좀비 대신에 흑인들이 들어 있다"고 했다. 무수한 좀비영화처럼 '모가디슈'가 몰개성 영화이고, 이런 영화를 보는 자신 또한 좀비가 된다면서 경계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대표하는 테오도어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가 쓴 '계몽의 변증법'에서 문화산업은 대중을 기만하는 장치에 불과하다고 했다. 시인은 '계몽의 변증법'처럼 "대중문화를 소비하면 좀비가 될 수밖에 없다"며 영화에서 무수히 총을 맞으면서도 달리던 메르세데스 벤츠를 여기에 대입했다. 오로지 남는 것은 소비성 이미지들이라는 것이다. 시는 랩의 라임처럼 무척이나 율동감이 넘친다.

시인은 미국인인 만큼 남북의 대치 상황, UN가입의 절박함 등 당시 한국의 사회적‧정치적 상황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편이다. 또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으면서도 동질성을 가진 한민족의 정서도 마찬가지다.

대신 그는 '모가디슈'에서 차별적 시선을 끄집어냈다. 제94회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 한국영화 출품작으로 선정됐으나 후보에도 오르지 못한 이유가 이 때문은 아닐까.

화가는 '모가디슈'를 "튼튼한 그물과 힘센 팔뚝을 가지고도 큰 고기를 건져 올리지 못하는 어부를 보는 듯하다"고 비유했다. 독특한 한국적 소재와 깔끔한 만듦새를 자랑하지만, 글로벌한 보편성을 무시한 무지함을 꼬집은 것이다.

영화는 이야기의 예술이다. 좋은 이야기는 관객을 낯선 세계로 이끌면서 우리 자신의 보편적인 인간성을 발견하게 한다. '모가디슈'가 잘 만든 영화지만, 아쉬웠던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겠다.

김중기 영화평론가

◆그림_이영철

이영철 작, 불이화(不二花)-Maqdishu 1991, 63×63×132㎝, 혼합재료, 2022.

이영철 작 '불이화(不二花)-Maqdishu 1991' 부분.
이영철 작 '불이화(不二花)-Maqdishu 1991' 부분.

이영철 작, 불이화(不二花)-Maqdishu 1991, 63×63×132㎝, 혼합재료, 2022.
이영철 작, 불이화(不二花)-Maqdishu 1991, 63×63×132㎝, 혼합재료, 2022.

◆시_제이크 레빈

누가 이따위 영화를 가지고 시 같은 걸 쓸 거야?

제이크 레빈

모가디슈라는 영화 봤어?

사람들 그게 역사 드라마라고 여기지.

하지만 그것은 좀비 영화.

좀비 영화 볼 때 난 좀비가 되지.

입에 들어가는 치킨이 인육인 척해.

양념 소스가 사람의 피인 척해.

좀비 영화 모가디슈 보고 나는

좀비가 되었어. 이제는 뇌가 없어.

좀비 영화 보고 시를 쓸 때

난 좀비 시인이 되지.

역사와 이념은 구닥다리,

인간의 감정은 하찮은 거야.

그냥 키보드 위에 침을 흘려.

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

숭고한 느낌이란 무엇이지?

살아도 죽은 산송장들은

늘 배달 음식을 주문해.

좀비들은 마음이 없어.

마음을 먹을 수 없어서

살아 있는 사람의 마음

무지 먹고 싶어 하지.

어쩌지 배달민족 앱엔

인간의 마음 파는 곳 없어.

ㅜㅜ 우울해, 우울해 ㅜㅜ

당신은 모가디슈에서 무엇이 놀라웠나요?

난 어린이 군인들 아주아주 재미있었어.

진짜 총 쏘는 노는 아이들

가짜 총 갖고 노는 아이들보다 더 아름다워.

남한에선 북한 사람들을 좀비라 부르지만

아프리카 대륙에선 사정이 달라지지.

모가디슈에서는 북한 사람들이 친구이고

아프리카인들이 좀비야.

아프리카에선 적을 사랑할 수 있어.

개는 컴퓨터 애니메이션이고

한반도는 남북통일이 가능하지.

하지만 진짜 주인공은 독일 자동차.

얼마나 많이 총알을 맞았든,

얼마나 많은 소말리아인들 치었든,

영화 속 차들은 부서지지 않아.

그들은 탱크와 같아.

나는 좀비인데,

메르세데스 벤츠가 되고 싶어.

화가 이영철□
화가 이영철□
시인 제이크 레빈
시인 제이크 레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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