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10월의 대구는 1948년의 제주(4·3), 여수·순천(10·19)과 세쌍둥이처럼 닮아있다. 해방부터 한국전쟁 전후까지 극심한 이념 갈등 속에서 이들 지역의 민간인들은 잔혹하게 집단 학살됐다.
하지만 피해자들에 대한 진상규명과 역사적 평가에선 큰 차이를 보인다. 제주와 여수·순천 사건은 특별법까지 제정돼 명예회복과 보상이 한창이지만, 10월 유족들의 피눈물 나는 세월은 7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이다.
◆'대구 10월'과 '제주 4·3'이 만나다
"우리 부모님도 이렇게만 돼 있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지난달 21, 22일 제주 4·3 항쟁 기념사업에 초청받은 10월 항쟁 유족회의 한 유족은 매일신문 취재진에게 이렇게 하소연했다. 당시의 아픔이 서린 곳들을 직접 둘러볼 때마다 유족들은 70여 년간의 서러움이 묻어난 한숨을 내쉬었다.
제주 4·3의 대표적 학살지 중 하나인 제주 곤을동에서 쑥대밭이 된 마을을 1시간가량 둘러본 10월 유족들은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며 눈물을 흘렸다. 곤을동 마을은 1949년 24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하고 22가구 전체가 불탄 곳이다.
10월 유족 임복식(76) 씨는 "우리가 겪은 학살이 가장 큰 비극인 줄 알고 있었다. 제주도민들이 몰살된 곳을 돌아보며 같은 시대의 아픔을 나눌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서러움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빨갱이'로 매도돼 아버지를 잃은 슬픔은 제주와 같지만, 보복과 연좌가 남긴 상흔을 어루만져주는 국가의 손길은 달랐다.
제주 북촌마을 학살을 기리는 '너븐숭이 4‧3 기념관'에는 정치권 등 유력 인사들이 참배하는 사진이 걸려 있었다. 반면, 대구에서 매년 열리는 10월 항쟁 위령제에는 대구시장조차 참석하지 않기에, 10월 유족들의 상심은 더욱 커졌다.
1949년 청도에서 총살당한 김영호(1925년생) 씨의 아들 김정섭(75) 씨는 "제주 4‧3은 제주도지사들이 홍보에 앞장서고 지원을 하면서 세상에 드러났다. 반면 대구 10월 항쟁은 감추기 바빴다"고 하소연했다.
제주 4·3 위령공원으로 조성된 봉개동 평화공원을 찾은 유가족들의 마음은 더 타들어 갔다. 39만㎡(12만 평)에 이르는 대규모 면적에다 희생자들의 위패를 보관한 봉안실까지 갖춰진 모습을 보고서다.
"우리도 이런 공간이라도 있으면 좋겠어요"라고 유가족들은 입을 모았다. 3천994기의 행방불명 희생자를 기리는 표식 앞에서도 가슴을 치며 "우리하고 너무 차이가 난다"고 한탄했다.
1950년 경북 의성에서 경찰에 끌려가 행방불명된 박진(1928년생) 씨 유족 박종경(73) 씨는 "대구도 10월 항쟁으로 희생되거나 행방불명된 사람들이 많은데, 제주의 평화공원을 보니 죽어서도 차별받는 것 같다"며 "제주보다 대구에서 먼저 항쟁이 일어났는데도 조명이 이뤄지지 않아 속상하다"고 말했다.
◆쏙 빼닮은 역사를 지닌 대구와 제주
대구 10월과 제주 4‧3 항쟁은 해방과 정부 수립, 전쟁 등 일련의 흐름 속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이다. 두 항쟁은 자주적 국가 수립에 대한 요구가 거센 가운데 미 군정의 탄압과 보도연맹(예비검속) 학살 등 역사적 뿌리가 같다.
1946년 대구 10월 항쟁 이후 좌우 갈등이 고조됐고, 이듬해 9월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정치적 혼란은 극에 달했다. 이어 1948년 2월 남한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총파업이 벌어졌지만, 그해 5월 제헌국회의원 선거와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이뤄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민간인 희생자들이 속출했고, 한국전쟁 전후의 집단 학살로 이어졌다.
같은 역사적 맥락에 있는 두 항쟁의 유족들은 한목소리로 '레드 콤플렉스'를 호소한다. '빨갱이'로 몰려 학살당한 부모의 흔적을 지워야만 연명할 수 있었다. 좌익 세력으로 분류돼 감시를 받았다. 대구경북에선 보도연맹원, 제주도에선 예비검속자로 구분돼 수시로 경찰서를 오갔다.
그나마 감시만 받을 때는 사정이 나았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에는 학살 대상이 됐다. 북한군에 밀려 속수무책으로 남하하던 이승만 정부는 이들을 북에 협조할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했다. 특히 좌익 운동을 하다 전향한 사람들로 조직된 '보도연맹'에 이름을 올렸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많다.
부친 이창석(1925년생) 씨를 잃은 제주도민 이희순(78) 씨는 "아버지는 한국전쟁이 터지고서 대전형무소에 수감 됐다가 그해 7월 3일 돌아가셨다. 정말 아무 죄도 없는 선량한 분이었다"고 말했다.
희생자 규모도 비슷하다. 제4대 국회 보고서에 따르면 문경과 봉화, 선산(구미), 청송을 제외한 대구·경북 19곳 군에서 한국전쟁 이후 군경에 의해 피살된 민간인은 3천418명이다. 같은 기간 형무소에 수감됐다가 처형된 제주 4‧3 수형자도 3천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김영란(65) 제주 4‧3 조사연구원은 "대구 10월 항쟁과 제주 4‧3은 무고한 민간인들이 공권력에 의해 학살됐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같다. 보도연맹(대구경북)과 예비검속(제주)이라는 명칭과 지역만 다를 뿐 같은 맥락에서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대구는 왜 안 되나요?" 한 맺힌 절규
쌍둥이처럼 닮은 두 사건 희생자들의 상황은 2022년 현재 극적으로 달라져 있다. 제주 4‧3 유족들은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을 받고 있다. 제주 4‧3 진압 명령을 거부해 민간인이 학살당한 여수·순천 사건도 특별법 시행으로 복권에 속도가 붙었다.
지자체와 국가가 명예회복을 시작했다. 제주도청은 유족들의 요구에 부응해 1995년 위령공원 조성계획을 발표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당선 직후 특별법 제정과 함께 진상 규명과 위령 사업을 시작했다.
유족들 가슴의 상처도 조금씩 치유됐다. 제주 4‧3 평화재단은 2009년부터 유족들의 진료비 지원 사업을 진행했다. 지난 2020년에는 트라우마센터를 열어 유족들의 심리 상담과 치료를 제공하고 있다. 이 재단의 올해 예산은 100억원에 달한다. 정부와 지자체가 각각 47억원과 37억원을 출연한다.
여수·순천 사건의 복권도 탄력이 붙었다. 올해 1월부터 시행된 특별법 덕분에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의 첫걸음이 시작됐다. 지난 19일에는 74년 만에 처음으로 정부가 주최한 합동 추념식이 열렸다. 국회에선 여수·순천 사건 희생자와 유족에게 보상이 필요하다며 특별법 개정 논의까지 이뤄지고 있다.
반면 대구 10월 항쟁 유족들은 특별법은커녕 지자체로부터도 외면받고 있다. 대구시가 올해 민간인 희생자 위령 사업으로 책정한 예산은 3천500만원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현재까지 집행된 금액은 1천300만원뿐이다. 이와 별도로 책정된 1천만원의 위령탑 정비 예산은 현재까지 단 한 푼도 집행되지 않았다.
채영희 10월 항쟁 유족회장은 "10월 항쟁의 상징인 대구콘서트하우스(옛 대구시민회관)에 표석을 세워달라 요구했지만, 대구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올해 3월에는 증언자 채록 사업도 거부했다"며 "지자체의 무관심이 대구 10월 항쟁이 잊혀지는 이유"라고 지적했다.
대구시 관계자는 "편성한 세부 사업들에 맞춰 예산을 집행하는 것이지 불용하는 건 아니다"며 "유지비 1천만 원은 위령탑에 훼손이나 추가 각인이 있을 때 집행할 수 있다. 현재로선 훼손과 추가 각인이 없어 집행하지 않고 있다"고 해명했다.
이어 "제주도는 특별법이 제정돼 예산 규모 등이 대구와 차이가 있다. 대구시는 기존 위령사업에 집중하고 있고, 구체적으로 더 계획하고 있는 것은 없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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