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노태우 전 대통령 서거 1주년] 정해창 "북방외교로 동아시아 중심 진입"

"北 도발 한번도 없던 시기"…정 전 청와대 비서실장 인터뷰
'민족자존·통일시대' 포부로 미·일 등 우방국 원활한 소통
5년간 45개국 수교 더 늘려
43년 만에 유엔에 동시 가입…대통령의 혜안·추진력·국력 출중한 보좌진 노력한 성과

1992년 9월28일 노태우 대통령 중국국빈방문시 양국정상회담 기념사진 (정해창 제공)
1992년 9월28일 노태우 대통령 중국국빈방문시 양국정상회담 기념사진 (정해창 제공)

26일이 노태우 전 대통령이 서거한지 1년째 되는 날이다. 고인의 치적으로 88 올림픽 개최, KTX 고속철 착공, 범죄와의 전쟁 등이 꼽힌다. 으뜸으로 북방외교를 통한 전통적 동북아 정세의 성공적 변화상을 거론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단 한 차례의 북한 무력 도발도 있지 않던 유일한 시기가 노태우 정부 때였다. 북의 도발이 극에 치닫고 있는 현실에서, 노 전 대통령이 추진했던 외교정책의 핵심이던 북방정책을, 당시 내각과 청와대 핵심 인사였던 정해창 변호사를 통해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북방외교를 구상하게 된 배경은?

- 노 전 대통령은 당선 후 대통령 취임사에 '민족자존의 시대'를 열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노태우 정부의 4개 국정지표 중 첫째도 민족자존이었다. 북방정책의 성공을 통해 분단시대를 마감하고 통일시대를 열어감으로서 한반도를 세계사의 변방에 머물게 할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중심국가로 키우자는 취지였다.

▶'한미일 vs북중러'라는 전통적 동북아 정세를 중시한 일부 국가의 반대가 있었을 텐데.

- 노 전 대통령은 1989년 1월17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미국, 일본을 비롯한 전통적 우방과의 협조를 강화하면서 동시에 소련, 중국,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과 적극적 관계를 증진해 통일 환경을 성숙시키는 북방정책을 적극 추진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후 여러 채널을 통해 미국 등 우방과 원활히 소통하면서 치밀하게 정책을 추진했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오히려 미국의 협조와 지원이 따랐으며 미국 부시 대통령은 자신이 노 대통령과 고르바초프의 회담을 주선했다고 자랑할 정도였다.

▶반공 열기가 높았던 시기였다. 국내 반대 여론 설득 작업은 어떻게 진행했나?

- 우려가 없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의 결심이 확고한데다 당시 내외사정으로 보아 시의성과 타당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무리라는 여론이 우세했다. 정책이 추진되고 성과가 나타남에 따라 반대 여론은 자연스럽게 수면 밑으로 가라 앉았다.

▶5년 단임 임기 제도하에서 임기 내 성공을 장담하지는 못했을 것 같다.

- 노 전 대통령은 알다시피 군인 출신이다. 그런 그가 5년이란 짧은 기간에 어떻게 북방정책을 훌륭히 성공시킬 수 있었는지에 대한 내 나름의 해답은 있다. 북방정책은 대통령 취임 전부터 오랜 준비 기간이 있었다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국군 보안사령관 시절 외교관에 대한 보안교육 때 제3세계 외교에 관심을 갖게 됐으며 전역 후 외교안보 담당 정무 제2장관(1981), 체육부 장관(1982), 내무부 장관(1982),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1983~1986)을 역임하면서 88서울올림픽 유치 활동을 지휘했다. 특히 모스크바·로스앤젤레스 올림픽 같은 반쪽 올림픽이 아닌 전 세계가 참여하는 올림픽 개최를 목표로 추진했다. 이 기간 세계 각국 정계·체육계 지도자들과의 접촉 등 국제 활동을 통해 외교 경험을 쌓아 왔다. 북방정책이 구상되고 준비되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던 셈이다.

▶그런 경험이 북방정책의 초석이 됐다는 것인가.

- 1987년 대통령 선거 당시 선거공약의 하나로 북방외교가 제시됐고 대통령 취임 후 얼마 되지 않은 1988년 7월 7일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을 통해 남북한 화해 협력과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골자로 하는 북방외교가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88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 89년 동구권 수교, 90년 소련과의 수교, 91년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채택, 92년 중국과 수교, 베트남 수교 등은 모두 개연성 있게 일사천리로 이룩된 것이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행정부 장관, 국회의원, 당 대표 등의 경력을 두루 경험한 뒤 대통령이 된 사람은 노태우 단 한명이다.

1992년 9월30일 오후 중국국빈방문시 상하이를 방문 대통령을 대리하여 만국공묘에 안치된 애국선열 박은식 선생 묘소 참배 (정해창 제공)
1992년 9월30일 오후 중국국빈방문시 상하이를 방문 대통령을 대리하여 만국공묘에 안치된 애국선열 박은식 선생 묘소 참배 (정해창 제공)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데 북방외교의 성과에 대해 다시 한 번 조명해 달라.

- 노태우 정부가 임기를 마친 1993년 즈음에 당시 국무총리행정조정실은 북방외교의 성과로 첫째 외교지평의 확대, 둘째 경제활동의 영역 확대, 셋째 안보 통일기반 확보라고 요약 보고한 바 있다. 외교적으로는 5년 동안에 수교국이 45개국이나 늘어나 171개국과 공식 관계를 갖게 됐으며 남북한이 유엔에 정부수립 후 43년 만에 동시 가입했다. 경제적 측면에선 인구 14억의 새로운 시장 확보, 동구권 러시아 중국 베트남, 러시아 첨단과학기술 도입, 시베리아 경유 단축 항공노선 등 가시적 성과가 나타났다. 공산권과의 수교로 안보환경 개선, 남북관계의 개선도 간과해서 안 될 부분이다. 북한의 도발이 한 번도 없었던 때가 노태우 대통령 시기로, 역대 정부 중 유일하다.

▶북한의 도발이 최근에 정점을 찍는 듯하다. 현 시점에서의 북방외교 정책의 성공 정도를 평가해 달라.

- 북방정책은 노 전 대통령의 선지적 혜안, 선제적 결단과 추진력, 김종휘·박철언 등 출중한 보좌진, 그리고 외교 인력의 노력에다 각계각층의 초당적 협조, 그동안 축적된 우리의 국력, 국제 환경의 호조 등이 아우러진 쾌거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 5년간의 노력과 성과일 뿐 그 뒤 30년과 비교해 평가할 일은 아니라 생각된다. 그동안 우리의 국력이 신장된 것은 뒤이은 정부 등에서 노 대통령의 북방외교로 크게 늘어난 국제 활동 영역을 잘 활용한 결과라 생각한다. 다만 남북관계가 큰 진전 없는 점, 국제정세가 대결의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 등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만 걱정스런 부분이다.

▶그래서 북방외교의 종점은 통일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 그게 바로 노 전 대통령의 생각이었다. 그는 퇴임 '무렵 우리는 통일 과정에 들어섰다'라고 말했다. 30년이 지난 지금 북방외교의 한 축인 우리의 활동영역 세계화란 목표는 넘치도록 달성됐으나 또 다른 목표였던 통일이란 숙원은 더 멀어진 느낌이다. 그러나 장래·미래의 일은 누구도 확실히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인간사라고 생각하면서 유비무환, 준비를 게을리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북방정책이 완성된 뒤 한국이 맞이할 변화상은?

- 북방외교의 궁극적 목표인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한반도는 그야말로 선진국 수준의 자유와 민주, 평화와 번영을 구가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새로운 도전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알다시피 지금 세계는 큰 변화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기후변화라는 전 지구적인 문제, 지구를 뛰어넘어 우주로 달려가는 노력, 인공지능으로 상징되는 기술 도약 등이 목전의 과제가 되고 있다. 크게 눈을 뜨고 변화를 놓치지 않으며 두둑한 배짱과 기민한 동작으로 하루를 뜻있게 보내자고 외치고 싶다. 북방외교를 시작할 때도 이와 같은 자세가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마지막으로 아쉬운 점과 보완점, 개선해야 할 점이 있다면.

- 그동안 6공화국 체제 아래 8분의 대통령이 정권을 맡아 5년씩 번갈아가며 책임을 수행해 왔다. 대한민국이란 입장에서 계속 일관되게 추진해야 할 외교정책이 5년마다 바뀐다는 것이 문제라 생각한다. 특히 남북 대치관계에서 상대는 변하지 않는 일관된 정책을 갖고 있는데 비해 우리는 5년마다 바뀐 방침으로 상대한다는 것이 큰 약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5년 단임제는 그런대로 의미가 있는 제도인 만큼 앞뒤 정부 간 국익 차원의 인계인수가 치밀하게 이뤄지고, 효율적인 분업관계를 생각하는 노력을 기울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해창은 누구?

- 1937년생으로 김천중, 경북고,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대구지검 검사를 시작으로 법조인으로 살다가 노태우 전 대통령 비서실장, 법무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대경학숙추진위원회 공동 위원장을 맡을 정도로 지역에 대한 애착이 깊다. 6공 출신 핵심 인사들의 모임이 있을 때마다 사실상 좌장역을 맡는다.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