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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 프라이싱거 여사 "한국서 한센병 환자 돌보다 62년이 지났네요"

[대구경북 인물사] (2) 가족에게 버림받은 환자에겐 영혼의 안내자 '마더 엠마'
하루 6번 기도 "삶에 감사할 뿐…바라는 것도 없어요"

엠마 프라이싱거 여사(Emma Freisinger·릴리회 명예회장)이 14일 툿찡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파티마홈에서 매일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엠마 프라이싱거 여사(Emma Freisinger·릴리회 명예회장)이 14일 툿찡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파티마홈에서 매일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엠마 프라이싱거 여사(Emma Freisinger·릴리회 명예회장)이 14일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대구수녀원 파티마홈에서 매일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엠마 프라이싱거 여사(Emma Freisinger·릴리회 명예회장)이 14일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대구수녀원 파티마홈에서 매일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가족에게 버림받은 환자에겐 영혼의 안내자 '마더 엠마'
하루 6번 기도 "삶에 감사할 뿐… 바라는 것도 없어요"

"원(願)도 한(恨)도 없죠. 그저 제 삶에 감사합니다."

미수(米壽·88세)를 넘어 백수(白壽·99세)를 바라보는 나이다. 아직도 맑디맑다. 피부도 백옥 같다. 한센병 환자를 돕는 데 반세기를 보낸 (사)릴리회 김영자 실장을 통해 어렵게 인터뷰 날짜를 잡고, 지난 14일 대구 금호지구 파티마홈에서 1시간가량 인터뷰이(Interviewee)를 만날 수 있었다. 우리말 인터뷰에 전혀 문제가 없었을 뿐 아니라 인터뷰어(Interviewer)에게 잔잔한 감동과 여운까지 남겼다.

◆오스트리아 30년, 대한민국 62년

엠마 프라이싱거 여사는 1932년 12월 17일 오스트리아 티롤 지방 엡스에서 아버지 요한과 어머니 마리안네 사이의 3남 5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독일 나치당 아돌프 히틀러 총통이 오스트리아를 강제로 병합한 시절에 초등학교를 다녔다. 해방 후 1957년에 잘츠부르크주립대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주립병원 외과병동 간호사로 일했다. 그 후 30세가 되던 1961년, 운명은 그를 대한민국으로 이끌었다. 그 운명의 세월은 벌써 62년째. 엠마 여사는 그저 두 세대(60년)가 넘도록 지나온 세월에 감사할 따름이다. 경북 군위군에 묻힐 곳도 미리 봐뒀다.

"납골당은 가기 싫어요. 화장해서 저를 기억하도록 작은 묘지 하나 만들어 주세요."

이 정도면 오스트리아 태생 한국 사람이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다. 게다가 62년을 이 나라 특히 대구경북을 위해 희생·봉사·헌신한 분이다. 전국 한센사업기관 및 한센복지협회, 전국 각지 정착마을, 가톨릭 자조회 등 한센병 환자들의 치료와 자립, 복지를 위해 한평생을 바쳤다. 물론 종교를 떠나 한국정부를 비롯해 해외 원조 기관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 타임머신을 타고, 62년 전으로 되돌아간다.

◆"고(故) 권묘임 여사님 정말 고마워요!"

엠마 여사는 1961년 4월 19일 한국에 도착해, 4월 24일 대구로 왔다. 주변에 도움을 주는 이들도 많았다. 이효상 경북대 독문과 교수는 한국어를 가르쳐줬고, 서순봉 경북대 피부과 전문의는 한센 사업 파트너로 공헌했다.

'평생 가장 고마운 한 분을 떠올려 달라'는 질문에는 "고(故) 권묘임 여사"라 답했다. 60년 전 한센병 환자들이 많았던 시기에 병원에 우물이 없어, 식수를 구하기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대다수의 사람들이 '문둥병 환자'라 멀리했는데, 당시 인근에 사는 권 여사는 "우리 집 물을 가져가라"며 친절하게 맞아줬다.

이후 엠마 여사의 삶은 한센인과 함께였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마더 테레사처럼 '마더 엠마'라 불릴 정도. 당시에는 한센병 환자들이 가족으로부터도 버림받아 병에 걸리면, 내쫓고 사망신고까지 하기도 했다. 그런 한센인들에겐 엠마 여사가 '따뜻한 엄마' 이상이었다. 병을 치료하고 보살펴 줄 뿐 아니라 일상의 환경으로 돌아가도록 돕고, 신앙 안에서 살 수 있도록 영혼의 안내자 역할도 했다.

지난 62년 한센사업을 되돌아보는 엠마 프라이싱거 여사.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지난 62년 한센사업을 되돌아보는 엠마 프라이싱거 여사.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성다미안 신부 전기 읽고 희생 결심

"한센병 환자를 돌보다 자신도 한센병에 걸려 선종한 성다미안 신부의 전기를 읽고, 감명을 받았습니다. 저 역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한센인들을 위해 희생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처음에는 아프리카 에티오피아로 가려 했지만, 오스트리아에서 유학했던 한국인 신부와의 인연으로 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엠마 여사가 처음 찾아간 곳은 한센인들의 정착촌인 고령과 다인의 한센인 마을. 그는 환우들과의 소통을 위해 한국어를 열심히 배웠고, 시외버스를 타고 이 마을 저 마을을 찾아다녔다. 때론 그곳에서 3~5일을 머물기도 했다. 그러던 중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지프차 한 대를 제공해줘, 빠르고 편리하게 이동하는 애마(교통수단)로 잘 활용했다.

1963년에는 오지리 부인회의 도움으로 당시 대구 외곽인 칠곡군 칠곡면 읍내리 언덕 비탈에 자리한 과수원을 매입해 4채의 조립식 숙소 건물을 지어 치료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한센병 환자들의 치료를 위한 병원을 건립하고 체계적으로 이들을 도울 수 있는 각종 지원사업 시스템을 갖추는 데 열정을 쏟았다.

엠마 프라이싱거 여사(Emma Freisinger·릴리회 명예회장)이 14일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대구수녀원 파티마홈에서 매일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엠마 프라이싱거 여사(Emma Freisinger·릴리회 명예회장)이 14일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대구수녀원 파티마홈에서 매일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안성완 기자 asw0727@imaeil.com

◆장수 집안의 DNA "80세 이상 동생 6명"

엠마 여사의 남동생 3명과 여동생 3명은 오스트리아에서 살고 있다. 80세 이상인데 다들 건강하다. 본인보다는 동생들이 누나이자 언니를 더 보고 싶어 한다.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에 한동안 고국에 갈 수 없었던 그는 "기회가 되면, 동생들을 보러 가고 싶다"고 희망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기도합니다. 지금은 사실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저 하루하루 행복하고,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과 제 신념과 의지에 따라 한평생을 잘 살았습니다. 어린 시절 절 위해 늘 기도해주던 어머니가 한번씩 너무 보고 싶어요."

엠마 여사의 주특기는 기도와 봉사활동이다. 인생을 즐기기 위해 했던 취미생활도 거의 없다. '된장찌개나 김치찌개를 좋아하느냐'는 댓바람 질문에는 "한국에 62년 살았는데, 안 좋아할 수 있겠느냐"고 위트 있게 답했다. 사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국물이 있는 탕'(ex) 갈비탕 등)이라고 했다. 매월 건강검진도 하고 있는데, 특별히 아픈 곳은 없다. 다만, 다리가 불편해 보행보조기로 걷는 데 도움을 받을◇ 뿐이다.

◆'국민훈장 석류장'에 '5·16 민족상'

상복이 터질 만하다. 엠마 여사는 62년간 한센인들을 위해 헌신한 대가이기도 하다. 나열하기도 힘들 정도. ▷1978년 국민훈장 석류장 ▷1979년 5·16 민족상 사회 부문 본상 ▷1992년 도덕대상, 일가상 ▷2007년 호암상 사회봉사 부문 본상 ▷2011년 오스트리아 정부 최고훈장 십자금장훈장 ▷2012년 생명의 신비상 ▷2016 세계한센포럼 특별상 등.

"저는 욕심이 없습니다. 돈도 많이 필요 없고, 비싼 옷이나 보석에도 관심이 없어요. 아주 젊었을 때는 물질적인 욕망도 있었지만, 지금은 한번 보세요. 이렇게 편하게 입으면, 마음이 한결 가볍습니다. 언제든 하느님 곁으로 갈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요."

엠마 여사와의 인터뷰가 끝날 무렵,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영혼이 맑으면 이렇게 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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