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도 이슥한 즈음, 그렇다고 첫 눈은 말고, 하늘이 너무도 투명해 자기도 모르게 실금을 피워물면, 그 틈새로 그리움의 촉수를 별님들에게 보내실 귀뚜라미의 울음 앞, 나는 내가 가장 특별하게 여겼던, 그러나 지금은 이승에서 만날 수 없는 한 야윈 표정의 시인을 기억할 수밖에 없다.
그는 시인(詩人)이라기보다 그냥 시(詩)로 살다간 것 같다. 자랑도 고백도 아니고 주장도 아니었던 시들, 그냥 뒷꿈치 살비늘처럼 그의 시력(詩歷)을 툭툭 벗겨냈던 것 같다. '그의 말년 8할은 온통 떨림'이었다. 문인수는 실종하고 '감옥수'처럼 버텼던 것 같다. 신경은 다 말라버리고 두 손은 겨울 벌판 으악새처럼 시종 벌벌 떨어댔다.
8, 9년 전 쯤으로 기억한다. KBS대구 '아침마당'에서 시 낭송 퍼포먼스를 보였던 방송이 나간 뒤였다. 그한테서 잠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수성구의 한 도서관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흡사 성황당의 돌무더기처럼 보였다. 그는 첫 시집만 빼고 출간된 모든 시집을 다 갖고 나왔다. 그리고 그가 좋아했던, 평상시에 늘 만지작거리던 호두 두 개를 내게 선물로 주었다.
"이 시인은 다른 시인의 시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신비한 에너지를 갖고 있어요. 여러 번 내 시를 갖고 시퍼포먼스 해준 것, 너무 고맙소."
그가 타계하자 내 서가에 꽂힌 그의 시집은 달빛처럼 내게 더 살갑게 말을 걸어왔다. 그의 시편은 마치 고생대 지층에서 방금 출토된 막장의 석탄 같았다. 녹물과 토분이 스며든 유물 같았다. 어두운 데 훤해보였다. 다들 '이건 이것'이라고만 말하는 데 그의 시는 모든 방향의 맥점을 존재론적으로 건드리고 있었다. 이건 또 뭐지! 그의 시는 늘 내게 전율을 안겨주었다. 시적 기교를 넘어선, 어떤 경지를 그려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대표시 여러 편을 갖고 퍼포먼스 릴레이를 벌여나갔다. '간통', '물빛 크다', '거 앉아보소', '쉬', '홰 치는 산', '달북' 등 10여 편을 나만의 감각과 시각, 그리고 색깔로 녹여냈다. 객석에 수초처럼 앉아 무대를 응시하는 그의 안광(眼光)이 날 더 긴장시켰다. 그의 망막 저 깊은 곳에서 길러 올린 오로라 같은 광휘로움을 내게 부적처럼 던져주었다.
그의 대표시 중 하나로 유명해진 '쉬'. 이 시는 어쩜 가장 문인수답다. 자기 아버지 이야기가 아니다. 정진규 시인의 부친상 상가에서 상주로부터 들은 간병기가 모티프이다. 아들이 임종 직전 아버지 오줌 뉘는 장면이 인상적인데 그는 시상이 사라질까 봐 바로 대구로 내려와서 단숨에 그 시를 완성시켰다고 했다.
그리고 3절로 된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에 4절을 추가해 툭하면 지인들에게 불러주었다. 늘 목소리보다 웃는 표정이 더 그 다웠다. 항상 초점을 조금 벗어난 듯한 해쓱한 미소, 그 속에서는 남성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머니로 환원된 시골 뒤란의 그늘 같은 너른 품이 느껴졌다.
그의 시도 그랬던 것 같다. 그의 시에는 이상한 성분의 발효균이 섞여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걸 '시 정신' 이라고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 시적인 것을 뛰어넘는 그 어떤 '인간미' 였던 것 같다. 지금은 집에 있는 호두를 보면 그가 생각난다. 이젠 만날 수 없는 시인. 가을이 올 때면 그의 시적 울림은 나의 시 퍼포먼스에 더욱 성결한 그리움으로 젖는다.
이 가을 햇 풀벌레 소리를 엮어 저승에 계실 그에게 이승의 소식을 띄우고 싶다. 우리의 삶이란 저승과 소통할 수 없겠지만 단 예술은 예외로 이승과 저승을 하나의 세월로 만들어준다는 것을 당신의 시가 분명하게 입증하고 있다는 걸 전해드리고 싶다. 참으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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