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학 속 호모에스테티쿠스] <26>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사랑의 속도

이경규 계명대 교수

1978년 개봉한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의 한 장면. 네이버 캡처.
1978년 개봉한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의 한 장면. 네이버 캡처.

'로미오와 줄리엣'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희곡을 책으로 꼼꼼히 읽어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수업에서 이 작품을 읽다 보면 놀라거나 실망하는 학생들이 적지 않다. 로미오가 '완전 바람둥이'라는 것이다. 사실 로미오는 줄리엣을 만나기 직전까지 로잘린이라는 여자를 짝사랑해 심각한 상사병을 앓고 있었다. 그의 첫 등장은 온갖 구애에도 무반응인 로잘린 때문에 좌절하고 번민하는 모습이다. 새벽에 숲 속을 헤매고 낮에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폐인처럼 지낸다. 그런 아들을 아버지는 '벌레 먹은 꽃봉오리' 같다며 한숨 쉰다.

대체 로잘린은 어떤 여자인가? 로잘린은 줄리엣의 사촌으로 '순결로 무장하고 절대 큐피드의 화살에 맞지 않는' 처녀다. 작품에 등장하지도 않지만 '온 세상을 내려다보는 태양도 그 같은 미인은 보지 못했을' 만큼 로미오에겐 절세미인으로 인식돼있다. 로미오가 문제의 캐플릿가 파티에 가는 것도 이 로잘린을 보기 위해서다. 그러나 여기서 줄리엣을 본 로미오는 외친다. "내 가슴이 여태 사랑을 했다고? 눈이여, 부정하라. 오늘 밤 이전에 나는 진정한 미인을 본 적이 없구나." 이후 로미오와 줄리엣의 초고속 사랑은 익히 아는 대로다. 둘은 만나자마자 키스를 하고 다음 날 결혼을 하고 도주를 계획하다 5일째 비운의 죽음을 맞는다.

로잘린 때문에 로미오가 흘린 눈물을 생생히 기억하는 로렌스 신부는 그의 급작스러운 변심을 이렇게 한탄한다. "프란치스코 성인이여, 이 무슨 변덕이란 말입니까?" 프란치스코는 평생 흔들리지 않고 청빈과 금욕을 실천한 성인으로 유명하다. 로미오의 변심을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가? 로미오 자신은 이렇게 변론한다. 로잘린과 달리 줄리엣은 '은혜를 은혜로, 사랑을 사랑으로 허용하는' 여자라고. 로미오가 로잘린을 포기한 것은 단순히 더 예쁜 줄리엣을 만났기 때문은 아니다. 미를 미로 향유하고 또 향유하게 '허용하는(allow)'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는 로잘린의 '미적 인색함(sparing)'을 엄청난 낭비라고 비판하는데, 미인이 금욕하다 죽으면 자자손손 이어져야 할 미의 대가 끊기기 때문이란다.

로잘린과 달리 사랑에 즉각 몸을 던지는 줄리엣은 말한다. "로미오, 당신과 무관한 그 이름은 던져 버리고 내 모두를 가지세요." 몬테규니 캐플릿이니 하는 이름에 묶여 아름다움과 사랑을 수용함에 주저하지 말라는 요구다. 자신도 얌전함이나 도덕이란 허울 때문에 사랑을 유보하지는 않겠다고 한다. 그녀는 '장미는 다른 이름을 붙여도 똑같이 향기로울 것'이라며 이름으로 본질을 가려선 안 된다고 비판한다. 바로 장미의 이름을 단 로잘린(Rosaline)이 미덕이란 관념으로 아름다움과 향기를 가둬두고 있다. 줄리엣을 만난 후 로미오는 로잘린이란 이름도 '그 이름이 주던 고통(that name's woe)'도 잊었다고 고백한다. 줄리엣의 사랑은 내숭 떠는 도덕의식보다 훨씬 강하고 빠르다. 13세 처녀가 첫날밤의 '지면서 이기는 게임(to lose a winning match)'을 고대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고속 사랑을 철없는 아이들의 불장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오늘날 뇌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첫눈에 반할 때 걸리는 시간은 7초이고 사랑을 느끼는 뇌가 도파민과 아드레날린 같은 화학 물질을 분비하는 데 0.2초 걸린다고 한다. 세상에 빛보다 빠른 게 있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에 들어와 있는 사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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