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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 우리는 정말 안 맞아, 고갱과 반 고흐

정연진 독립큐레이터

정연진 독립큐레이터
정연진 독립큐레이터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정말 나와 닮은, 그리고 취향까지 비슷한 마치 도플갱어와도 같은 관계도 있는가 하면, 정말 맞지 않은, 매번 의견 충돌이 일어나며 어쩌면 이렇게도 다를까 싶은 관계도 존재한다. 물론 피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같은 분야에서 일이나 활동 등을 한다면 싫어도 마주칠 수밖에 없는 관계다. 미술의 역사 속에서는 아마도 빈센트 반 고흐와 폴 고갱이 서로에게 이러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싶다.

반 고흐와 고갱은 1887년 파리에서 고흐의 동생인 테오의 소개로 처음으로 만났다. 그들은 서로의 작품을 보고 호감을 느끼게 됐다. 이를 계기로 그들은 정기적으로 그림과 편지를 교환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반 고흐는 고갱에게 자신의 '해바라기' 두 점을 보내기도 했다.

1888년 프랑스 남부 도시 아를의 노란 집에 반 고흐가 예술가 공동체를 설립해 고갱을 초대했다. 네덜란드 태생인 반 고흐는 파리의 예술가들에게는 생소한 아를 지역을 예술가 공동체로 변화시키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경험도 풍부하며 확고한 성격을 가진 고갱이 이를 이끌어주기를 원했다. 이러한 그의 바람과 달리, 고갱은 아를로 이주하면 한 달에 150프랑을 주겠다는 테오의 제안을 받아들여 결국 반 고흐의 끈질긴 초대에 응했다.

그들의 동거는 처음에는 순조롭게 이뤄지는 듯했다. 두 미술가는 같은 주제로 각각의 작품을 그리기도 하고, 종종 서로의 작품에 대해서나 인상주의 이후 미술에 대한 서로 다른 접근 방식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이는 등 긍정적인 관계를 지속했다. 하지만, 이러한 토론이 너무 열정적으로 되면 자칫 다툼으로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다툼에 대한 고흐의 말을 인용하자면 그들은 "지나치게 짜릿"해졌다. 결국 짜릿함은 찌릿함으로 변해 12월 23일 고흐가 칼로 고갱을 위협하고 자신의 귀 일부를 자른 지 얼마 되지 않아, 결국 고갱이 작업실을 떠났다.

이후 다시는 두 사람이 직접 만나는 일은 없었지만, 1890년 4월 반 고흐가 사망할 때까지 서신은 계속됐다. 하지만 그들의 단명하고 강렬한 관계는 각자의 인생에서 흔적을 남겼다. 고갱은 그의 그림에 해바라기를 배치해 반 고흐에게 몇 차례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전 증권 중개사 출신이라 이해타산에 밝았던 고갱과 성직자를 꿈꿨고 돈에 대한 집착을 싫어했던 반 고흐, 단순하고 평평한 채색 기법을 선호했던 고갱과 두꺼운 임파스토 기법을 선호했던 반 고흐 등 그들은 정말 미술이라는 범주 안에 있다는 것과 둘 다 이름에 알파벳 'G'가 들어간다는 것 빼고는 하나부터 열까지 맞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함께한 그 시간이 있었기에 다채로운 작품들이 나올 수 있었고, 이후의 그들의 작품의 방향성에도 영향을 줬기에 이러한 관계가 유해하다고만 볼 수는 없다. 악연도 인연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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