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여름날 대구 신천 경부선 철도교(푸른다리). 기적소리 요란한 기관차가 지나간 다리 위에 다시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이 일대 다리라곤 멀리 신천교(현 칠성교)와 수성교 뿐이어서 위험해도 신천을 건너기엔 기차가 드문 철길이 지름길. 물동이를 인 아낙네, 중절모 신사, 시장 가는 엄마도 양산 그늘에 아기를 등에 업고 하늘 높은 철길을 꼬물꼬물 걷습니다.
푸른다리 일대는 피란민이 모여 살다 눌러 앉은 곳. 다리 아래는 갈 곳 없는 고아, 넝마주이 부랑아들이 우글대는 우범지대. 서울로 진출한 거지왕 김춘삼도 이곳 출신이었습니다. 다리 위 철길에선 인명사고가 잇따라 '희망의 다리'로 바꿔보자고 파란색을 칠해 '푸른다리'로 불렸지만 현실은 '절망의 다리'였습니다.
부랑아들은 휴지나 고물을 주워 팔아 끼니를 해결했습니다. 1961년 4월 무렵엔 푸른다리파 일명 '해파리' 일당이 부쩍 행패를 부렸습니다. 교동 강산면옥 앞 구두닦이 소년까지 건드리고 돈을 뺏었습니다. 그해 3~4월 두 달 동안 경찰에 걸린 것 만 10여 건. 경찰이 뜨면 그때뿐, 푸른다리는 늘 이들의 아지트였습니다.
푸른다리는 '마의 철교'로 소문났습니다. 1959년 정월 대보름날 다리를 건너다 술과 달에 취해 실족사 한 직공(職工). 1961년 6월 20일 승강구에서 졸다 열차가 급정거 하는 바람에 추락사 한 승객. 1963년 8월 28일 동생을 업고 건너다 눈앞에 들이닥친 열차에 동생을 다리 밑으로 던지고 자신은 무참히 깔린 청각장애 언니…. 인명사고가 끊이질 않았지만 그럼에도 철길로 걷는 데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신천1·2구(1·2동)에는 70자(21m)를 파도 물이 안나…." 상수도가 없던 그 무렵 신천 부락민들은 도리 없이 강 건너 공동 우물물을 철길로 길러 먹었습니다. 공동우물 이용자는 1천여 세대 5천여 명. 하도 위험해 철길 옆 난간에 인도교를 놔 달라는 진정도 번번이 허사. 임시 변통으로 하천에 드럼통을 엮어 만든 가교는 비만 오면 맥없이 쓸려갔습니다.
이런 사정에 신천 1구(1동) 홍 모씨는 사비로 거금을 들여 가까운 냇바닥에 우물을 파고는 물을 팔았습니다. 우물물 한짐은 10환. 철길로 물을 긷다 죽기보단 낫다고 인근 5백여 세대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사 먹었습니다.
철도 교통량도, 푸른다리 보행자도 갈수록 늘어 1964년엔 이곳에서 사망자가 10월 초까지 이미 30명. 특단의 조치가 내려졌습니다. 10월 4일 철도청 대구보선사무소가 푸른다리 양 끝 제방에 보행을 막는 콘크리트 담장을 치자 신천동 부락민이들이 괭이를 들고 달려왔습니다. 식수 통로가 막힌다는 아우성에 보선사무소측은 침목으로 가교 부설을 약속했지만 말 뿐이었습니다.
절망의 푸른다리에 마침내 희망이 찾아왔습니다. 1965년 10월, 우여곡절 끝에 푸른다리 옆으로 제2신천교(현 신천교)가 놓였습니다. 예산이 모자라 대봉교 신설, 수성교 확장 등 대구 시내 11곳 교량 공사도 다 미루고 이 다리 하나만 세웠습니다.
푸른다리 아래 하상부지에는 자활촌이 생겼습니다. 남대구경찰서 도움으로 설치한 대형 텐트에 '직업소년 자활단' 간판이 걸리고 구두딱이 통, 넝마주이 망태도 선물로 들어왔습니다. 세끼 식사에 야학까지 소문나 입단 희망자가 줄을 이었습니다.(매일신문 1960년 2월~1965년 10월)
신천 동쪽 주민들이 열차를 피해 물을 긷고, 시장엘 가고, 강건너 도심을 드나들던 1958년 푸른다리. 반달처럼 푸근했던 둥근 교각은 2014년 선로 확장공사때 재건축으로 간데없고, 그토록 원했던 철길 옆 보행로는 2016년에서야 들어섰습니다. 하얀 수증기를 토해내며 덜커덩 덜커덩 밤새도록 달리던 기관차는 쏜살같이 달리는 고속철로 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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