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영상이 기억난다. 구순이 넘은 어머니가 60대 중반의 아들을 향해 "길 조심해라" 하고 당부하는 장면이었다. 인간극장이나 다큐멘터리에서 종종 접하던 그런 장면이었다. 처음에는 웃음이 났다. '아이고, 할머니. 본인이 더 조심하셔야지요. 아들은 이미 환갑이 지난 나이인데…' 하고 말이다. 그땐 그 모습이 귀엽고 엉뚱해 보이기까지 했다. 지나치게 걱정이 많은 분이거나, 아들을 유난히 끔찍이 여기는 특이한 케이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그때 왜 웃었을까? 이제 막 열 살을 넘긴 아들을 키우며, 나는 매일같이 걱정한다. 아이가 학교에서 다치지는 않을까, 어른이 될 때까지 건강하게 자라 줄까, 내가 이 세상에 없을 때는 누가 이 아이를 보살펴 줄 수 있을까. 눈앞에 있는 아들의 모습보다 몇십 년 후의 아들을 상상하며 걱정하는 나를 발견한다. 그러고 보니, 나도 그 할머니처럼 아들을 향해 매일 "조심해"를 외치며 산다. 그 영상이 웃기게 보였던 이유는, 그때의 내가 그런 감정의 깊이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있다. 나는 그 말의 뜻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누군가의 감정이나 행동을 진심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같은 감정을 느껴 보기 전까지는 어려운 일이다. 내가 엄마가 되어보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던 감정의 깊이를, 나는 안다고 착각하며 섣불리 평가했던 그때를 후회한다.
이런 경험은 문화예술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이어진다. 세계적 명화를 보기 위해 몇 시간을 기다려 박물관에 들어가 탄성을 터뜨리던 사람들도, 동네 갤러리에서 추상화를 마주할 때 "이건 나도 그리겠다"는 말을 내뱉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작가의 기법이나 예술성을 온전히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자신이 이해하는 범위 안에서만 예술을 판단하려는 경우도 있다. 특히 예술에 어느 정도 익숙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런 태도가 더 쉽게 나타나기도 한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수십 년간 쌓아 온 예술가의 열정과 내면이 고작 한 시간 공연으로만 평가받는다. 그 음악이 탄생하기까지의 고뇌와 시간은 무대 위에 다 담기지 못하는데도, 우리는 너무 손쉽게 평가하고, 판단하고, 등급을 매긴다.
나도, 그런 사람이었다. 공연을 조금 봤다고, 음악을 조금 안다는 이유로 어느 순간부터는 쉽게 평가하고 있었다. 예술가의 깊이를 상상하기보다는, 내 기준에 맞지 않으면 "별로였다"고 말하며, 이해보다 판단이 먼저였다. 다른 이가 함부로 평가할 땐 "왜 저렇게 무례하지?" 생각하면서도, 정작 나는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 예술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그 예술가의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되지 않을까 한다. 예술을 이해하려면, 그 예술을 만든 이의 감정과 과정에 깊이 들어가 그 마음을 진지하게 이해하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그리고 언젠가 나도 구순의 할머니처럼 아들이 걱정될 때 그 말의 깊이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예술가의 입장에서 그 작품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을 때, 비로소 그 예술의 진심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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