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42) 1956년~1970년 대구 수성못 충혼탑

나들이객 웃음소리, 유가족들 통곡소리 공존했다
매해 현충일 법이산 자락 눈물바다…수성유원지엔 관광 온 소풍객 가득
市, 인파·소음 문제 철거·이전 결정
대덕산 기슭에 새 순국선열탑 완공…수천명 한국전쟁서 숨진 군인 추모

1970년 6월 6일 제15회 현충일을 맞아 수성못 뒤 법이산 기슭에 4천8백여 전몰 군경 용사 위패를 모신 충혼탑에서 추념식이 열리고 있다. 충혼탑 너머로 수성못과 수성들이 보인다. 1956년 이곳에 처음 조성된 충혼탑은 1970년을 마지막으로 철거돼 위패는 1971년 4월 20일 앞산에 신축한 새 충혼탑으로 이전 봉안됐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70년 6월 6일 제15회 현충일을 맞아 수성못 뒤 법이산 기슭에 4천8백여 전몰 군경 용사 위패를 모신 충혼탑에서 추념식이 열리고 있다. 충혼탑 너머로 수성못과 수성들이 보인다. 1956년 이곳에 처음 조성된 충혼탑은 1970년을 마지막으로 철거돼 위패는 1971년 4월 20일 앞산에 신축한 새 충혼탑으로 이전 봉안됐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62년 6월 6일 대구 두산동 수성못 뒤 충혼탑에서 제7회 현충일 추념식이 열려 전몰 장병 유가족들이 분향하며 오열하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62년 6월 6일 대구 두산동 수성못 뒤 충혼탑에서 제7회 현충일 추념식이 열려 전몰 장병 유가족들이 분향하며 오열하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65년 6월 6일 수성못 뒤 법이산 기슭 충혼탑에서 열린 제10회 현충일 추도식에서 강계원 대구시장이 추도사를 읽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65년 6월 6일 수성못 뒤 법이산 기슭 충혼탑에서 열린 제10회 현충일 추도식에서 강계원 대구시장이 추도사를 읽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65년 6월 6일 대구 수성못 뒤 법이산 기슭 충혼탑에서 제10회 현충 추념식이 열려 유족 대표들이 분향하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65년 6월 6일 대구 수성못 뒤 법이산 기슭 충혼탑에서 제10회 현충 추념식이 열려 유족 대표들이 분향하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69년 6월 3일 대구 수성국민(초등)학교 5,6학년 어린이들이 현충일앞 앞두고 수성못 충혼탑을 청소하고 있다. 5백여 명의 어린이들은 중동에 자리한 학교에서부터 1.5km 떨어진 충혼탑까지 거리를 쓸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69년 6월 3일 대구 수성국민(초등)학교 5,6학년 어린이들이 현충일앞 앞두고 수성못 충혼탑을 청소하고 있다. 5백여 명의 어린이들은 중동에 자리한 학교에서부터 1.5km 떨어진 충혼탑까지 거리를 쓸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70년 6월 6일 대구 수성못이 내려다 보이는 법이산 자락 충혼탑. 경북 도내 4천800여 명의 전몰 군경 용사 위패를 모신 이곳에서 제15회 현충일 추념식이 열렸습니다. 오전 10시 정각 묵념에 이어 김덕엽 경북지사가 1백여 꽃다발로 둘러 쌓인 충혼탑 제단에 향을 사르자 500여 명의 유족들 사이에서 구슬픈 통곡 소리가 새어 나왔습니다.

현충일이 국정 공휴일이 된 건 1956년부터. 이전까지는 육·해·공군이 합동으로 순국의사를 기념해 왔으나 그해 4월, 이날을 공휴일로 지정하면서 군인만이 아닌 전 국민이 함께 추모하기로 했습니다. 추모 대상은 한국전쟁에서 숨진 국군 장병을 비롯한 모든 순국 선열. 이에 따라 1956년 4월, 이곳 수성못 뒤 법이산 기슭에 처음으로 대구 충혼탑이 건립됐습니다.

이때부터 해마다 현충일이면 이곳에는 유족들의 통곡 소리가 메아리쳤습니다. 15회째 인 이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군 군악대의 나지막한 연주에 대구여고 합창단의 현충의 노래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자 식장은 울음바다로 변했습니다. 목을 놓아 아들을 찾는 부모들, 남편을 부르는 여인들…. 유족들은 식이 끝나도 제단 앞에서 땅을 치며 돌아갈 줄 몰랐습니다. 하지만 바로 앞 수성못 분위기는 사뭇 달랐습니다.

손꼽는 유원지, 수성못에는 공휴일을 맞아 아침부터 들놀이 나온 인파로 장사진을 이뤘습니다. 유가족들이 흐느끼는 충혼탑 바로 앞에 늘어선 술 가게며 음식점에선 호객 소리가 요란하고, 소풍객을 실은 차량은 풀풀 먼지를 내며 꼬리를 물었습니다. 이날 만큼은 음주가무를 금하고 유족들에게는 점심값에다 극장 입장권, 버스 승차권을 건네며 아픔을 함께 했지만 이곳은 영 딴판이었습니다. 들놀이객에 충혼탑은 그저 관광물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연유로 수성못 충혼탑은 1970년을 마지막으로 철거하고 대명동 대덕산(앞산) 자락에 새 충혼탑이 건립됐습니다. 철거 이유는 갈수록 늘어나는 수성못 유원지 인파와 소음, 게다가 충혼탑 부지가 개인 소유 땅라는 것. 대구시 당국은 충혼탑 건립 후 땅 주인 서모(70) 씨를 찾아 9천917㎡(3천 평)에 이르는 충혼탑 부지를 사 들이려 해마다 설득 했지만 끝내 실패했습니다.

충혼탑을 세운 자리는 땅 주인인 그가 영면하려 점지 해둔 묘터라는 것. 서 노인은 남의 묘터에 허락도 없이 세운 충혼탑을 당장 철거하라며 호통을 치면서도 국가에서 한 일이라 도리 없이 여태 참아왔다고 했습니다. 그는 충혼탑 이전 결정으로 이제는 안심하고 여생을 즐기게 됐다며 안도했지만, 주민들은 쓸모없는 산비탈이 관광 적지로 값이 치솟아 수성못에 새 부자가 났다며 침이 마르도록 부러워했습니다.

1971년 4월 20일, 마침내 대덕산(앞산) 기슭 9만9천173㎡(3만평) 부지에 높이 30미터, 둘레 9미터의 웅장한 새 충혼탑이 완공됐습니다. 이날 제막식에는 수성못 충혼탑에 자리했던 전몰 군경 용사 위패 이전 봉안식도 함께 열렸습니다. 4개월로 예정된 공사는 공기를 훌쩍 넘겨 1년 1개월 만에 끝이 났습니다. 나라 살림살이가 여의치 않다 보니 돈(세금)이 모자라 이 무렵 국가 공사는 늑장 준공이 다반사였습니다.

새로 단장한 앞산 충혼탑에서 맞은 첫 현충일에는 김덕엽 지사, 김수학 대구시장 등 각급 기관장과 유족, 시민 등 수천 명이 모였습니다. 앞산 충혼탑 앞으로 펼쳐진 두류산 자락은 곳곳이 헐벗었고, 그 아래로 듬성듬성 자리한 단층 가옥은 볼품 없지만 충혼탑 앞 제단에는 돼지 온마리에 갖은 제물이 가득했습니다.

수많은 외침의 역사 속에 한국전쟁을 겪은 터라 저 무렵 순국 선열을 기리는 마음은 너나 없이 '진심'이었습니다.

1970년 3월 20일 대구 대명동 대덕산(앞산) 기슭에서 대구 시내 각 기관장이 참석한 가운데 새 충혼탑 기공식이 열리고 있다. 3만평 부지에 높이 30m, 둘레 9m 크기로 조성되는 새 충혼탑은 이듬해 4월 20일 준공됐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70년 3월 20일 대구 대명동 대덕산(앞산) 기슭에서 대구 시내 각 기관장이 참석한 가운데 새 충혼탑 기공식이 열리고 있다. 3만평 부지에 높이 30m, 둘레 9m 크기로 조성되는 새 충혼탑은 이듬해 4월 20일 준공됐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71년 4월 20일 대구 대명동 대덕산(앞산) 자락에 신축된 새 충혼탑 준공식과 함께 수성못 충혼탑에서 옮겨온 전몰 군경 위패 봉안식이 열렸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71년 4월 20일 대구 대명동 대덕산(앞산) 자락에 신축된 새 충혼탑 준공식과 함께 수성못 충혼탑에서 옮겨온 전몰 군경 위패 봉안식이 열렸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71년 6월 6일 제16회 현충일을 맞아 새로 단장된 대덕산(앞산) 기슭 충혼탑에서 김덕엽 경북도지사, 김수학 대구시장 등 기관장과 유족, 시민 등 수천 명이 참석 한 가운데 현충제가 열리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71년 6월 6일 제16회 현충일을 맞아 새로 단장된 대덕산(앞산) 기슭 충혼탑에서 김덕엽 경북도지사, 김수학 대구시장 등 기관장과 유족, 시민 등 수천 명이 참석 한 가운데 현충제가 열리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82년 6월 6일 제27회 현충일을 맞아 보이스카우트 학생들이 앞산 충혼탑 계단에서 내빈과 유가족을 맞이하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82년 6월 6일 제27회 현충일을 맞아 보이스카우트 학생들이 앞산 충혼탑 계단에서 내빈과 유가족을 맞이하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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