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6·25전쟁 발발 75주년을 맞는 해다. 75년 전 나라를 구하기 위해 참전한 수많은 이들의 희생과 헌신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평화의 밑거름이 됐다.
1931년생인 김춘원(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대구시지부 원로자문위원) 옹은 6·25전쟁의 생생한 기억을 지닌 참전용사다. 초등학교 교사를 휴직 중이던 그는 전쟁 발발 직후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해 국군6사단 수색중대원으로 6·25전쟁에 참전하며 죽음의 위기를 세 번이나 겪었다.
그는 국가와 국민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사선(死線)을 넘었고, 혁혁한 전과를 세워 화랑무공훈장을 가슴에 달았다. 1957년 일등상사(현재 상사)로 전역한 그는 교단에 복직해 학생들을 가르치다 1997년 교장으로 정년퇴임했다.
퇴임 후에도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경북대 명예학생 과정과 명예대학원 과정에 등록해 5년 동안 손자·손녀뻘 되는 학생들과 함께 공부했다. 2022년부터 지난해까지는 90대의 나이에 대구 북구지역 경로당을 순회하며 스마트폰 교육 강사로 활동했다. 특히 지난 2022년엔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대구시지부 사업인 전쟁증언록 제작사업의 편집위원장을 맡아 '참전 대한민국 무공수훈자 전쟁증언록-6·25 전쟁과 베트남 전쟁'이라는 책을 내 대구시 교육감 표창을 받았다.
지난 9일 대구 북구보훈회관에서 만난 김춘원 옹은 자신의 좌우명인 '수능천석'(水能穿石, 물방울이 떨어져 돌을 뚫는다) 정신으로 전쟁과 인생의 고비를 이겨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입대를 결심한 계기가 있었나.
▶교사를 휴직하고 서울에서 대학을 다닐 때였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했고 3일 뒤 북한군이 서울로 밀려왔다. 이 같은 혼란 속에 무작정 부모님이 있는 고향(경북 의성)으로 향했다. 소백산을 넘어 의성에 도착하니 8월 초순이었다. 북한군은 고향까지 쳐들어왔고 가족들은 피난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피난 온 영천에서 "이렇게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서 고향 친구 4명과 함께 입대를 결심했다. 이 중 키가 작은 한 친구는 제외되고 저를 포함한 4명이 8월 25일 6사단 수색중대에 학도병 신분으로 입대하게 됐다. 이후 약 1주일간 기본 훈련만 받고 전투에 바로 투입됐다. 19세 때의 일이다.
-첫 전장은 어디였나.
▶처음 투입된 곳은 군위 화산지역이었다. 군위 화산전투는 낙동강 방어선의 한 축으로 제가 최초로 넘은 사선이었다. 나중에 전사(戰史)를 찾아보니 영천 신녕지구전투로 불리더라. 제가 소속돼 있던 6사단이 육탄으로 적의 탱크부대를 퇴각시켜 북진의 계기를 이룬 전투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적탄에 맞아 숨졌다.
훈련을 마치고 전장으로 향할 때 대형 트럭 3대에 나눠 타고 출발했는데, 돌아올 때는 두 대 분량의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군번도 받지 못한 채 전사한 전우가 부지기수였다. 이름도 알지 못한 이가 대다수지만 그들만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다.

-이후 상황은 어떻게 됐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북진이 시작된 뒤, 제가 소속된 부대는 계속 밀고 나가며 그해 10월 26일 평안북도 희천까지 올라갔다. 이대로 통일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중공군이 내려오면서 전세가 바뀌었고 결국 후퇴했다.
평안북도 묘향산까지 내려왔을 때 중공군이 길목을 빙 둘러 포위하고 있었다. 꼼짝없이 죽음을 목전에 두었던 그때, 유엔군의 폭격으로 포위망이 뚫리며 간신히 빠져나왔다. 또 한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것이었다.
-총 세 차례 죽을 고비가 있었다.
▶1951년 5월 강원도 화천군 파로호 일대와 북한강 상류 지대 탈환을 위한 작전을 수행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중공군은 밤이 되면 습격을 해 왔다. 날이 어두워지면 피리를 불고, 북과 꽹과리를 치면서 공격해 양측에 사상자가 속출했다.
5월 하순쯤 적의 침묵 속에 대공세가 예측되며 긴장이 고조됐다. 그때 사단사령부로부터 '적정을 파악해 보고하라"는 특명이 내려졌다. 당시 수색 작전 임무를 받고 출전하면 2~3일 동안 아군의 최전방 경계선을 넘어 적진 가까이 침투해 잠복해 적의 동태를 살피는 목숨을 건 작전이 계속됐다. 복귀를 장담할 수 없는 작전에 나선 전우들은 다시 못 돌아올 수 있다는 생각에 마지막 인사처럼 작별 악수를 하고 떠났다.
제가 수색 작전에 투입됐을 때 조용하던 적들의 집중사격이 시작됐고, 저와 대원들은 인근 논둑 아래 수로에 몸을 피하며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날 밤 우리는 능선 쪽에 잠복해 적을 기다렸다. 새벽 무렵 예상대로 중공군이 나타났고 치열한 접전 끝에 적군 1개 분대를 섬멸하고 1명을 생포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날 전공을 세운 분대원 8명은 모두 무공훈장을 받았다.
-두려움은 없었나.
▶전장의 특성상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할 상황이 아니었다. 나라가 없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컸다. 어떻게 하면 적을 물리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전역한 뒤의 삶은 어땠나.
▶교사로 복직하는 게 쉽지 않았다. 1957년 일등상사(현재 상사)로 전역한 직후 3년간은 변변한 직업을 구할 수 없었다. 고향에 내려가 형님 농삿일을 거들고 산에서 약초를 캐어다 팔며 삼남매를 키우며 힘든 삶을 살았다. 다행히 1960년 복직이 됐다.
하지만 교사 자격시험 출신이었기에 정규과정을 밟은 사범학교 출신 교사와 출발선이 달랐던 터라 공백을 채우려 꾸준히 노력했다. 승진에 필요한 기본점수도 사범학교 출신과 다르고, 교장까지 오르는 경우도 드물어 동료보다 몇 배 더 노력을 기울였다. 50대 초반 방송통신대학 초등교육학과를 졸업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그 결과 1981년 교감으로, 1989년 교장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좌우명이 '수능천석'이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지금도 무엇이든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시작을 하면 끝을 본다. 전장에서도 이 말을 가슴에 새기며 복무했다. 모두들 '수능천석'을 가슴에 품으면 어렵고 힘든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잘 이겨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참전 유공자로서 국가 보훈정책 등에 아쉬운 점은 없나.
▶무공수훈자회 회원들과 얘기를 하다보면 상당수가 어느 정도 서운함을 갖고 있다. 대표적인 건 처우개선과 각 유공자 간 형평성 문제다. 참전명예수당이 보다 현실화되고 참전 유공자들의 명예가 후손으로 승계돼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6·25 역사가 점점 희미해져가는 것 같다. 참전용사들의 희생과 헌신을 모든 국민이 오래 기억하고, 이들이 합당한 존중과 예우를 받는 보훈 문화가 자리 잡길 바란다.
요즘 우리 사회는 갈등과 분열로 얼룩져 있다. 마지막 바람이 있다면 온 국민이 하나로 단합된 조국을 보고 싶다는 거다. 특히 안보문제에 대해선 국익을 최우선으로 국민 모두가 하나 된 마음을 보여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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