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백정우의 읽거나 읽히거나] 보는 위치가 바뀌면 보이는 게 달라진다

[책] 면장 선거
오쿠다 히데오 지음 / 은행나무 펴냄

[책] 면장 선거
[책] 면장 선거

겨우 디지털시대에 적응했더니 이젠 AI와 챗Gpt가 떡하니 버티고 섰다. 때는 '잃어버린 20년'의 끝자락이던 2006년. 그때도 그랬을 것이다. 아날로그 세대가 마주한 디지털시대의 낯선 광경들. 전후 일본을 부흥시킨 기성세대로선 신세대의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모습을 좀체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터. 오쿠다 히데오는 변화 기로에 선 일본사회, 이를테면 시대의 물결 앞에서 혼란스러워하는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문제를 정신과의사 이라부를 내세워 정면 돌파한다. 닥터 이라부 시리즈의 세 번째 이야기 '면장 선거'는 전작보다 더 진지하고 한결 따뜻하다. 합리성과 효율에 목맨 젊은 세대가 생존과 전통에 집착하는 기성세대를 이해하려는 면모도 보인다.

프로야구팀 구단주이면서 최대 발행부수 신문의 회장인 다나베는 노인성 우울증으로 잠을 못자고, 성공한 IT기업인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안포는 청년성 알츠하이머 단계이며, 40대에도 톱스타를 고수하는 배우 가오루는 체형 관리에 병적으로 집착한다. 이라부 시리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그렇듯, 현재를 지키고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 자신을 혹사하며 쉼 없이 담금질 중이다.

잿더미에서 일으킨 나라를 나약한 이들에게 맡기기 불안하다는 강박과, 구태의연한 기성세대는 일본의 미래가 될 수 없다는 패기의 충돌.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과민으로 불면에 시달리는 다나베가 "이 모양들이니 전후 세대는 근성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55쪽) 라고 아무리 투덜대봐야 시대의 물결은 도도하게 흐를 뿐이다. 전후 세대 역시 완고하긴 매한가지. 컴퓨터가 장난감을 대신하다보니 디지털 사고가 판에 박힌 것 아니냐는 사회자 말에 "아날로그 아저씨들의 한탄은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들어서 진력이 났다. 세계는 이미 인터넷으로 하나 된 지 오래다. 그걸 알아채지 못하는 쪽이 이상한 것"(97쪽)이라고 비아냥댄다.

책의 메인이자 대미를 장식하는 '면장선거'는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지역민 간의 뿌리 깊은 갈등을 다룬다. 도쿄에서 파견된 공무원 료헤이는 이해할 수 없는 섬의 정서라니. 전직과 현직 면장의 파벌로 나뉘어 뇌물과 매수를 일삼으며 골 깊은 싸움을 벌여온 면장 선거지만 토착민의 시선은 확연히 다르다.

"우리 센주는 인구가 적은 섬이야. 자원도 없고, 재원도 부족하고,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모두 가난해야겠지. 그렇지만 부족하나마 그런대로 인프라가 정비된 문화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건 다 선거 덕분이지. 무풍 선거였다면 면장은 아무 일도 안 했을 거라고. 몇 표 차이로 뒤집히는 숙적이 있기 때문에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각오로 공공사업을 끌어오는 거야. 정의감만으로는 외딴섬을 운영해갈 수 없어. 부정은 정당방위야. 태어났을 때부터 당연하게 병원이나 학교가 있는 도쿄 놈들이야 알 리가 없지. 우리는 모두 섬을 사랑한다. 그렇기 때문에 싸우는 거야."(283쪽)

영화평론가 백정우
영화평론가 백정우

오쿠다 히데오는 금권과 야합과 협잡으로 얼룩진 면장 선거라는 해묵은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통찰한다. 중심부의 눈으로 재단하지 말고, 도쿄 기준으로 바라보지 말고, 현지의 습속과 목소리에 귀 기울이라고 호소한다. 첫 단편에서 다나베가 탄식하듯 읊조리는 독백 "어느새 새 고층빌딩을 짓고 있었다. 정재계에서는 이것이 바로 버블이라는 걸 눈치나 채고 있을까." '면장 선거' 출간 1년 뒤 글로벌 경제위기가 닥쳤고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으로 들어갔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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