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해야 할 때 말하지 않는 것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역사 앞에서의 책임 회피다. 권력의 부당함을 알면서도 침묵한 언론, 지식인, 사회 지도층은 그 순간을 모면할 수 있어도 결국 역사에는 책임 회피한 비겁자로 기록될 것이다.
70년 전인 1955년 9월 14일, 대구 중앙로 대구매일신문(매일신문)에 자유당 경북도당 간부들과 정치 깡패들이 난입해 직원들을 폭행하고 윤전기에 모래를 뿌려 신문 제작을 방해했다. 전날 실린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사설 때문이었다. 사설은 9월 10일 당시 주유엔대사 임병직의 대구 방문 환영 행사에 학생들을 동원한 행태를 통렬히 꾸짖었다. 평소 자유당과 이승만 정권에 따가운 감시와 날 선 비평을 해 미운털이 박힌 대구매일신문에 대한 정권의 불만이 이 사설로 폭발한 것이다.
이 상식적이고 당연한 주장에 대한 대가는 가혹했다. 경찰은 국회 진상조사단 앞에서 '백주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는 해괴한 해명을 내놓았다. 필자 최석채 주필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한 달 간 구속됐고 이듬해에야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최 주필이 구속돼 있는 동안 권력은 끊임없이 신문사와 최 주필을 회유했으나 굽히지 않았다. 권력의 행태를 고발한 최 주필과 이를 지면에 실어낸 신문사의 용기는 언론의 길이 어떻게 가야 하는가를 증언해 준다, 최 주필은 당시 사주였던 가톨릭대구교구 서정길 주교의 격려가 큰 힘이 됐다고 회고했다.
대구매일신문은 이 필화 사건 이후 '대매'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시민들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잡는다. 판매부수가 급증하면서 사세가 확장됐고 전국적인 정론지로서 위상을 굳히게 된다. 이듬해인 1956년 정·부통령 선거 보도를 통해 반독재 야성 언론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1958년 총선과 1960년 2·28 대구학생운동, 3·15 부정선거를 고발하고 4·19 민주운동에서 드러난 추상같은 보도에서 대구매일은 언론의 사회적 책무를 외면하지 않았다. 대구매일의 정론직필 논조와 저항정신은 '대매정신'으로 면면히 이어져 급변하는 오늘날 언론사와 언론인에게 뚜렷한 아이콘으로 각인 되고 있다.
1991년 최 주필이 세상을 떠났을 때 전국 신문들은 어떤 폭압에도 할 말은 하는 그를 '대쪽 논객' '직필 언론인'으로 칭송했다. 최 주필과 같은 시기 근무했던 매일 출신들은 "언론은 국가발전이라는 목적에서 정부와 같더라도 권력과는 늘 대척점에서 견제하고 감시해야 한다"는 신조를 지켜낸 선배였다고 그를 기억한다. 그는 1981년부터 1987년까지 대구매일 명예회장으로 재직하면서 그의 호를 딴 '몽향칼럼'을 연재했다,
2000년 IPI(국제언론인협회)는 최 주필을 20세기 세계언론자유 영웅 50인에 선정했다. 최 주필이 생전 신문사 주필과 한국신문편집인협회 회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독재와 불의에 항거하고 직필한 것은 개인의 영예를 위해서가 아닌, 언론인으로서 사명을 다 한 것이었다.
AI시대 디지털과 유튜브 등으로 미디어 환경이 변해도 언론의 역할은 할 말을 하는 데 있고 그 주역은 리거시 미디어, 단연 신문이 맡고 있다.
오늘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70년 전 대구매일 사설을 다시 읽으며, 최석채 주필의 침묵을 거부한 용기를 언론과 언론인에게 침묵의 공범이 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로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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