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중구청과 산하 봉산문화회관은 그림 대신 거울을 걸어 홍역을 치렀다. 흔한 얘기로 '과거는 오늘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하니 말이다.
지난달 24일 봉산문화회관에 윤석열 전 대통령을 비하하는 그림이 걸렸을 때, 앞서 논란이 됐던 회관의 과거를 떠올린 사람이 적잖을 테다.
'중구 봉산문화회관 운영 조례' 제5조에 따르면 공공문화시설인 회관에서 정치적·종교적 의미가 담긴 행사를 열어선 안된다. 회관 측은 이 규정을 알고도 꾸준히 어겨왔다.
회관은 지난해 6월 이태원 참사·채상병 사건 등을 매개로 당시 정권을 비판하는 작품을 전시했다. 지난달 13일에는 절이 주최하는 불교 행사를 개최했다. 이를 미리 안 중구의회가 회관에 '행사 취소' 약속을 받아냈지만, 며칠 뒤 행사는 강행됐다.
회관의 조례 위반 수준은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이번에는 피살당한 아베 전 일본 총리를 반라(半裸)상태로 묘사한 작품을 전시하려다, 계획을 바꿔 나체의 윤 전 대통령을 해부하는 그림을 걸었다. 머리가 둘로 쪼개지고, 내장이 훤히 보이는 모습이 기괴해 신문에 실을 수도 없었다.
이는 불교 행사가 열린 지 불과 열흘 만에 벌어진 일이다. 회관과 중구청이 불교 행사의 조례 위반 지적을 엄히 여겼다면 더 큰 뒷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림이 아닌 거울이라는 것이다. 봉산문화회관의 판단력과 회관 관리 책임이 있는 도심재생문화재단·중구청의 재발 방지 역량은 저 그림 속 모습같다. 처참하기 그지없다.
어떤 정치적 성향의 인사를 풍자·비하했냐의 문제가 아니다. 수년 전부터 국회 의원회관을 비롯한 각 공공시설에 전현직 대통령을 소재로 삼은 작품이 걸려 적절성 시비가 붙는 일은 손에 다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물론 표현의 자유는 폭넓게 보장돼야 하지만, 공공문화시설에 한해선 공공복리와 사회 갈등 방지 등을 이유로 각종 제한이 가해질 수 있다는 의견 역시 합리적이다. 정치적 함의를 담은 도발적인 작품이 걸릴 사설 갤러리는 세상에 널렸다.
전시회 시작 전 문제의 작품들을 배제한 건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중구청이 이번 사건을 돌아보고, 재발 방지 노력을 기울일지에 대해선 확신이 들지 않는다.
중구청은 사건 당일 재단과 회관에 대한 대대적인 감사를 진행 중이었음에도, 감사 대상에선 이번 사건을 쏙 빼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같은 규정을 어긴 불교 행사는 살펴보겠다고 한다. 상식에서 벗어난 태도다.
요즘 회관과 재단의 문제점은 책임 질 사람이 점점 줄어간다는 것이다. 회관장은 이미 임기가 만료돼 공석이고, 재단 상임이사도 다음달 중순 퇴직 예정이다. 하다못해 그간 논란이 된 모든 행사를 담당한 실무자도 육아휴직을 떠났다. 중구청이 "책임 추궁할 사람이 남아있지 않다"는 핑계를 댈 시기까지 버틸 작정인 게 아니길 바란다.
중구청이 끝내 이번 전시회의 기획 과정을 반성하지 않는다면, 중구청은 이미 다음 거울의 예고편을 찍고 있는 셈이다. 훗날 중구청은 더 골치 아픈 작품이 걸려도 막을 수 없을지 모른다. 사실 선례를 아는 입장에선, '안 봐도 비디오'다.
지난달 24일 봉산문화회관에는 공공문화시설에 걸릴 자격이 충분한, 품격 있는 작품도 많았다. 주민들이 이를 알고 '안 본 눈' 살 걱정 없이 전시회를 찾는다면 중구청에게도 상당한 보람이 될 테다. 회관과 중구청의 '거울 전시'가 이번이야말로 마지막이길 기대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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