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은 노사문제와 노동자 죽음을 다루는 소재인데, 특정 노동사건을 환기하거나 유추할 수 없는 소리로 뭉개져 있는 〈낭만적인 개소리〉다. 제목이 강렬하면서도 시적이고, 희곡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구조다. 무대는 고공투쟁의 장소인 75미터의 굴뚝을 그로테스크하게 시각화했는데, 벽면은 로보트 태권V의 가슴을 연상하게 하고 주제곡은 "달려라 달려 태권V, 날아라 날아 로보트 태권V, 정의롭게 싸우고 평화를 지키는 영웅" 로보트 태권V다. 노래는 정의의 상징이자 희망의 구호였다. 그러나 이미경 희곡 〈낭만적인 개소리〉 속 굴뚝 위에서 울려 퍼지는 노래는 더 이상'정의의 노래'가 아니다. 75미터 고공에서 흘러나오는 태권V의 선율은 세상을 구하는 영웅의 주제가가 아니라, 버티는 자들의 체념과 분노, 그리고 '살아남기 위한 노동자들의 자조'로 변한다. 작품은 '정의'라는 이름의 영웅주의가 어떻게 무너지고, 그 잔해 위에서 인간이 어떤 선택을 강요당하는지를 응시한다. '낭만적인 개소리'는 고공투쟁과 노사갈등, 연대의 방식, 부패한 기업과 한 국회의원의 이면과 정치기술들, 그리고 싸움과 생계 사이에서 고뇌하는 한 인간의 모든 것을 "낭만적인 개소리"로 정의한다.
부패로 파산해 가는 한 자동차 회사의 노조원인 극중 인물 고진옹(성노진 분)의 현실 생존과 인간적인 고뇌를 담아내는 〈낭만적인 개소리〉는 다른 노동연극들에 비해 투쟁과 연대의 방식을 무대 위로 직접 소환하거나, 노사 갈등과 특정 사건을 환기시키는 구조적 서사를 택하지 않는다. 대신 75미터 굴뚝 위에서 고공투쟁을 벌이며 사측과 대립하고 있는 고진옹의 내면을 통해 투쟁과 연대의 의미, 사측과의 정치적 결탁, 노조원의 죽음을 둘러싼 은폐와 정치화, 그리고 반복되는 노사 갈등의 문제들을 바라본다. 그러면서도 향하는 지점은 아이러니하게, 이 모든 것이 발화되는 지점을 향해 "낭만적인 개소리"로 정의하며 훅을 날린다.〈낭만적인 개소리〉에서 중요한 장치는 반복되는 〈로보트 태권V〉의 주제가다. "정의로 뭉친 주먹"이라는 가사가 반복될수록, 현실의 정의는 점점 무너진다. 마지막 장면에서 고진옹은 모든 것을 잃고 다시 굴뚝으로 오른다. 죽은 동료들의 환영 속에서 그는 노래를 부른다."달려라 달려 로보트야 / 날아라 날아 태권브이."정의의 주먹을 쥔 고진옹의 '비행'은 더 이상 고공투쟁 비행을 할 수 없는 연대의 희망의 노래이다.
◇75미터 굴뚝위의 '로보트 태권V', 진혼가가 된 희망의 노래.
무대는 75미터의 굴뚝 위다.'노사합의 이행하라', '정리해고 철폐' 등의 현수막이 버티고 있는 공간이다. 더 이상 투쟁의 현장이 아니라, 노동자가 버텨야 살아남을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의 피신처다. 고진옹과 허수인, 그리고 이미 세상을 떠난 동료 홍성호가 등장해 굴뚝 위에서 "정의로 뭉친 주먹 태권브이처럼 날아보자"는 대사들은 희극적이면서도 처절하다. 연출 구태환은 이 장면을 통해 '높이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사회 구조'를 시각화한다. 굴뚝은 단순한 노동 투쟁의 장소가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노동자들의 내면이며, 노사 갈등으로 고립된 사회의 축소판이다. 그곳에서 울려 퍼지는 로보트 태권V의 노래는 더 이상 영웅의 찬가가 아니라'노동자의 처절한 진혼가'로 들린다.
작품은 "투쟁 이후의 고진옹"을 따라간다. 굴뚝에서 내려온 노동자들이 환호 속에 복직의 희망을 품지만, 회사는 약속을 저버리고 '명예훼손'과 '업무방해'의 죄명을 씌운다. 그렇게 372일간의 고공농성은 한순간에 "업무 방해 행위"로 규정된다. '회사 인사팀장'으로 변한 고진옹은 반복되는 노사 갈등과 고공투쟁, 노조원의 죽음과 싸움의 방식, 기업의 부패와 정치의 기술 사이에서 흔들린다. 그러면서도 투쟁과 연대의 방식이 달라지지 않는 현실 속에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노조원의 인간적인 고뇌는 때로 사측의 입장으로 보이기도 한다.그러나 싸움의 방식과 연대가 지속될 수 없는 노사 갈등의 순환은, 여전히 이들과 이들을 향한 소리가 현실이 될 수 없는'낭만적인 개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반복될 뿐임을 연출적 감각으로 상기(想起)시킨다.
연극은 고진옹(성노진 분)을 중심 인물로, 이 작품의 9할을 끌고 간다. 극은 굴뚝 고공농성에서 1년간 공안투쟁을 벌이던 고진옹의 동료 노동자 홍성호(김민재 분)가 내려간 뒤 일주일 만에 자살한 사건 이후, 굴뚝에 남은 허수인(이수형 분)과의 추모 장면으로 시작된다. 극은 홍성호가 마치 정의와 평화를 지키는 로보트 태권V가 되어 굴뚝 농성장에 여전히 살아 있는 듯 그려지고, 연극은 만화경 같은 판타지와 현실이 교차된다. 시간은 홍성호의 죽음 이전과 이후가 교직되며, 마치 고진옹의 고공농성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듯 뭉개진다. 지역 국회의원의 중재로 굴뚝을 내려온 고진옹은 정치인과 사측의 작전처럼 인사팀장이 되어, 함께 고공투쟁을 이끌던 동료 도근행(조창희 분)에게 연봉 협상과 명예퇴직안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발생한다. 동료는 "노조원으로 강경했던 형이 변했다"고 말하고, 고진옹은 "낭만적인 개소리"라고 받아친다.
대사는 이렇다."무슨 낭만적인 개소리야. 현실을 직시해! 너 납품업체에 부품 몇 개 빼돌린 거 소송 걸리면 인생 쫑나. 그러면 아픈 홀어머닌 누가 모실 거야? 아무도 우리한테 관심 없어. 우린 그저 좆나 가난하고 좆나 무식하고 좆나 시끄러운 존재라고 생각해. 성호형, 너, 나, 다 착각한 거라고. 정의로 뭉친 주먹이다, 용감하고 씩씩하다, 악의 로보트 때려 부순다, 애들 노래 불러가면서 계속 착각 속에 산 거야."극중 인물의 핵심 대사다.'정의','연대','평등','투쟁'이라는 단어들이 현실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가를 드러내는 냉소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낭만적인 개소리〉는 욕설이 아니라, 노동 현실을 바라보는 이 시대의 자조이자 풍자적 언어로 환원되는 것이다.
◇"자본의 논리, 정치의 기술" <낭만적인 개소리>
고공투쟁의 2라운드는 도근행의 자살로 전환점을 맞는다. 도근행의 자살 이후 여론은 격렬하게 요동치고, 사측은 기다렸다는 듯 고진옹의 고압적인 협상 태도가 자살의 원인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어 여론전을 주도한다. 고진옹은 순식간에 가해자로 뒤바뀐다. 지역구의 강성 노조를 잠재우고 정경유착을 통해 '자동차 도시' 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하던 국회의원 안상태(강민호 분) 역시 흔들린다. 그는 한때 고진옹을 '정치적 협상 카드'로 활용하려 했으나, 그 카드가 자신을 향한 화살로 돌아오자 입장을 바꾼다. 정치의 논리는 곧 생존의 논리이며, '노동자 출신' 이력은 선거용 장식으로 소비될 뿐이다. 그 사이, 후배의 죽음에 괴로워하던 고진옹은 현실의 굴뚝 아래에서 절벽 끝으로 내몰린다. 사측은 그를 '관리 부실 책임자'로, 정치인은 '이용 가치가 끝난 투사의 노동자'로 바라본다. 고진옹이 향한 곳은 다시 75미터 굴뚝의 농성장이다.
마지막 장면은 동료 노동자 허수인과의 대화다. 전화 한 통이 걸려오는데, 허수인 역시 마치 죽은 것으로 처리된다. (이미 첫 장면부터 죽은 인물로 등장한다.)여전히 자본과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사라져가는 노동자들이 존재하는 한, 정치인의 소비와 변명도, 자본가의 욕망도, 노동자의 연대도 결국 〈낭만적인 개소리〉가 되는 메아리일 뿐이다. 구태환 연출은 이미경의 희곡을 현실적이면서도 시각적 몽환으로 전환시킨다. 굴뚝이라는 구조와 천막,'홍성호의 조끼'와 '화분' 같은 오브제들은 현실과 환상의 공간으로 전이된다.〈낭만적인 개소리〉는 8장 구성의 에피소드 희곡이다. 극 초반에는 굴뚝 농성과 노사 협상, 해고, 정치권력의 개입 등 구체적 사회 현실을 다루며 노동 현장의 리얼리즘 형식을 보이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메타적 구조로 변주된다. 여전히 정의와 평화를 위해 비행하던 로보트 태권V가 그리워지는 시대다.
동료 홍성호와 허수인의 환영, 태권V의 노래, 하늘을 나는 듯한 '비행' 동작들은 현실을 넘어선 환상적 장치이자 알레고리다. 마지막 장면에서 고진옹이 굴뚝 위로 올라가 "정의로 뭉친 주먹 태권V"를 부르며 죽은 동료들과 함께 노래한다. 굴뚝은 더 이상 노동 현실의 현장이 아니라,'인간의 신념과 절망이 교차하는 공간'으로 확장된다. 그러기에 고진옹의 로보트 태권V는 멈출 수 없는, 희망과 연대를 갈망하는 처절한 노래다. 이 작품에서 노동자로 분한 배우 성노진의 연기는 뜨겁다. 연기의 테크닉보다는 75미터 굴뚝 농성자인 노동자 고진웅의 시간 속으로 다가선다. 구태환은 작가가 설계한 구조를 다소 철거하면서, 드라마적 분위기로 노동 현장의 리얼리티를 살려내고 있다. 환상–현실 구조가 극중 장면에서 겹쳐지니 분위기가 묘하다. 노동 현장 체험이 아닌 기록(희곡)에 의한 75미터 굴뚝 고공농성 노동자의 소리라 할까. 구태환 연출의 〈낭만적인 개소리〉는 성노진을 위한 연극이다.
구태환 연출의 극단 수는 그동안 〈말을 버린 사내〉, <띨뿌리〉,〈나생문〉,〈바람, 다녀가셔요〉, 〈넓은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마음은 춤춘다〉, 〈마트료시카〉등 동시대의 다양한 사회현상과 인간 존재를 연극으로 탐구해 오고 있다.작가 이미경은 〈말을 버린 사내〉,〈초능력 갤러리〉, <부인의 시대〉, 〈우와우와우우우와〉,〈마트료시카〉,〈분노하세요!〉, 〈그게 아닌데〉 등에서 우화와 풍자의 표현이 날카로운 작품들을 써왔다. 특히 배우 성노진은 연극, 영화, 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에서 높은 몰입감을 형성하는 진정성 있는 연기력을 보여주고 있다.
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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