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1월 19일은 대구가 키운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의 38주기다. 경남 의령 출신의 이병철 회장은 마산에서 협동정미소 창업으로 첫 사업을 시작했다. 그가 대구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38년, 그러니까 김해평야 땅 투기로 재미를 보다가 중일전쟁으로 쓰라린 실패를 체험한 다음 해였다.
현재의 달성공원역 부근에서 삼성상회를 창업한 이병철의 주력 업종은 국수 제조(별표 국수), 건어물과 과일 유통, 해외무역, 그리고 술 제조(조선양조)였다. 반도체 성공으로 세계 굴지의 기업을 일군 기업가의 출발은 국수와 술을 빚어 파는 사업이었다.
인류 역사를 보면 예로부터 전쟁은 큰 기업 탄생의 결정적인 계기였다. 전쟁이라는 난세를 맞은 기업가들은 혼란과 폐허 속에서 새로운 기회를 포착하고 도전하여 부를 창출한다. 기업인이야말로 창의적 아이디어로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천재적 재능의 소유자들인 셈이다. 이병철이 큰 기업가로 결정적 도약을 이룬 계기는 6·25 때 부산에서의 전시(戰時) 무역 덕분이었다.
◆대구가 키운 기업가 이병철
해방 후 서울을 거점으로 무역업을 하던 이병철은 6·25를 맞아 수도 서울이 적에게 점령됨으로써 무일푼 신세가 되었다. 실의에 젖어 부산 피난길에 대구를 방문한 그에게 대구의 조선양조 직원들이 그동안 술을 빚어 번 돈 3억 원을 내놓는다. 이병철은 이를 종잣돈으로 삼아 피난 수도 부산에서 삼성물산주식회사를 새로 설립한다.
전시 무역이란 일선에서 쏟아져나오는 포탄 탄피와 폐철을 수집하여 일본에 내다 팔고, 국내에서 필요한 생필품과 의약품을 수입하여 판매하는 사업이었다. 삼성물산 설립 1년 후 결산 결과 출자금 3억 원이 60억 원으로 불어났다. 1년 만에 투자금의 20배 수익을 수확한 것이다. 대구 시민들이 조선양조가 빚은 막걸리와 별표 국수 열심히 팔아준 덕에 이병철의 재창업 자금이 만들어졌고, 거부(巨富)의 종잣돈 역할을 했으니 대구 시민도 세계 일류기업 삼성전자의 탄생에 중대한 공로자로 자부해도 좋을 것 같다.
이병철은 부산으로 몰려든 피난민의 참상과 암담한 국가의 현실을 보며 새로운 사업 모티프를 발견한다. 일본에 탄피 팔아 번 돈으로 일본 제품 사다 국내에 팔면 손쉽게 돈을 벌 수는 있다. 냉정하게 보면 그것은 일본 좋은 일만 하는 것 아닌가.
차라리 탄피 팔아 번 돈으로 국내에 공장을 짓자. 제품 생산을 위해 피난민을 고용하면 실업자 구제해서 좋고, 돈 벌어 세금 많이 내면 국가를 위해서도 도움이 된다. 게다가 소비자들에겐 우수한 품질의 국산품을 값싸게 공급하여 생활 안정에 기여할 수도 있다. 그야말로 일석삼조(一石三鳥) 아닌가.
이런 생각이 구체화 되어 피난 수도 부산에서 제일제당의 창업으로 이어졌다. 물건 팔아 번 돈을 공장 짓는 데 투자했으니, 이병철은 국내에서 상업자본을 산업 자본화하여 성공을 거둔 효시에 해당한다. 국내 생산이 전혀 없어 밀수입에 의존해 왔던 설탕은 대박 히트 상품이 되었다. 아침에 설탕 한 트럭을 싣고 나가면 저녁 무렵 돈을 한 트럭 싣고 들어왔다. 제당 설립 2년 만에 이병철은 '돈병철'로 불렸다.
그의 다음 도전 분야는 모직, 즉 양모를 비롯한 동물의 털로 옷감을 제조하는 일이었다. 미군 군복 물들여 입는 피난지 국민의 가엾은 모습을 지켜본 이병철이 의생활 혁명을 이루기 위해 도전한 분야였다. 이왕 옷감 제조 사업에 뛰어들 바에야 옷감 짜는 일 중에서도 가장 까다롭기로 소문 난 모직에 도전한다. 그것도 국제경쟁력을 갖춘 최고급 제품을 생산하여 국내 양복지 시장을 석권한 영국제를 몰아내고, 수출한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모직 공장의 위치는 대구였으니, 이번에도 대구 시민들의 성원이 성공의 에너지원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병철은 전 세계 최신 기계를 도입하고, 종업원을 피눈물 나도록 훈련시켜 골덴텍스라는 히트상품을 제조해 냈다. 국내 시장에서 영국제·일본제 양복지를 몰아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국가 발전 전략의 모색
제당과 모직업으로 성공하기까지 이병철의 목표가 부(富)의 축적이었다면, 다음 목표는 국가 차원의 경제 재건이었다. 그것은 후진국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방법론의 모색이었다. 이병철은 1958년 사비를 들여 한국경제재건연구소를 설립한다. 이병철이 소장을 맡았고, 홍성하가 간사장, 그리고 이기붕·김영선·김유택·임문환·주요한·송방용 씨를 비롯한 당대의 정치·경제·학계 중진들이 참여하여 한국경제가 나아갈 방향을 놓고 진지한 의견을 나누었다. 이병철은 이 연구소 설립 목적에 대해 자서전 『호암자전』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외국 원조 없이 지탱할 수 있는 한국경제의 재건, 자립방안을 토의했다. 이때 나는 이미 사업에 종사하는 한 기업인의 입장을 넘어 이 나라 경제 전체의 장래를 걱정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이 연구소에서 얻은 소득은 대한민국의 살길은 농업이 아니라, 외자도입을 통한 공업화의 길밖에 없다는 현실 인식에 눈을 뜬 것이었다. 이병철은 제당과 모직의 성공 과정에서 중대한 체험을 하게 된다. 최신 공장을 지어 종업원 훈련시켜 최고 품질의 제품을 만든다. 이 제품을 해외에 수출하여 번 돈으로 국내에 필요한 원자재를 수입한다. 최신 공장을 지을 돈이 없으니, 외국에서 돈을 빌려 공장을 짓고, 수출해서 번 돈으로 빚을 갚는다. 이것이 한국을 선진국으로 도약시키는 외자도입형 수출주도형 공업화 전략의 핵심이었다.
그가 창안한 국가 발전 전략은 한국일보에 '우리가 잘사는 길'을 통해 사회에 제시되었다(1963년 5월 31일~6월 5일). 그 핵심 내용을 살펴본다.
'3년 전부터 미(美) 원조가 줄고 있다. 이 감소액을 차관으로 메워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우리가 아시아 반공 보루로서 수원(受援) 태세를 확립하고 조야(朝野)가 합심 노력하면 앞으로 10년 동안 10억 불 정도 차관 획득도 꿈은 아니다. 다음으로 한일회담이 원만히 타결되는 날엔 일본에서 10년간 6억 불을 도입하는 일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또 독일, 이태리, 불란서 등지에서 10년간 5억 불 정도 차관을 확보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상을 합치면 10년간 21억~23억 불가량 외자도입을 확보할 수 있다. 이것으로 공장을 지어 재투자를 하면 10년간 15억~20억 불 공장 건설 자금을 확보할 수 있다. 이 재원으로 400만 달러 규모의 공장 1천개를 건설, 평균 500명을 고용하면 연관 산업 및 부양가족까지 합쳐 500만 명의 고용증대를 기대할 수 있다. 즉 농가인구를 공장에 흡수하여 그들의 생활이 보장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당시 군사정부를 비롯한 재계와 학계에서는 한국경제 재건을 위한 방법론을 둘러싸고 외자도입을 통한 공업화의 길과, 인구의 대다수가 취업하고 있는 농업을 먼저 개발하여 농촌 구매력과 원자재 공급능력을 배양하면서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방법론이 격돌하고 있었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석학인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아서 루이스 교수, 네덜란드의 얀 틴베르헨 등은 농업 우선론을 적극 주창했다.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들은 공업화에 필요한 자본과 기술, 인재, 노하우, 공업 발전에 필요한 생태계 등이 전무하니 농업에 우선 투자하여 경제를 일으키라고 충고했다. 농업 개발로 어느 정도 자본이 축적되면, 그것으로 소규모 공장(小공업)을 짓고, 중간 규모 공장 건설(中공업)을 거쳐 단계적으로 중화학 공업의 길로 나가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외자도입형 수출주도형 공업화 전략의 탄생
이병철이 보기에 농업 우선 투자는 한국 실정에 맞지 않는 전략이었다. 한국 사회의 후진성 탈피를 위해서는 희망 없는 농업에 매달려 시간 낭비하지 말고, 기간산업 건설이 빠를수록 좋다는 입장이었다. 세계 석학들 입장에서 볼 때 가난한 농업국 대한민국이 수출주도 공업화를 추진하고, 여기서 얻어지는 경제력으로 농촌 근대화 앞당긴다는 '선(先) 공업화, 후(後) 농업 발전' 전략은 성공 가능성이 없는 무모한 만용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병철은 해외 차관을 도입하여 공장을 짓고, 그 제품을 수출하여 국민 먹여 살리는 '외자도입을 통한 기간산업 건설' 아이디어를 내놓고 박정희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개별 기업들의 교섭으로는 외자도입이 어려우므로 미국, 유럽, 일본 등 세 지역에 외자유치단 파견을 허락할 것. ▷민간 차관에 대해 정부가 지급보증을 해줄 것. ▷민간경제외교를 지원하기 위해 해외 공관에 유능한 상무관을 주재시킬 것. ▷외자에 따른 공장 건설 시 내자는 최대한 융자해 주는 동시에 후취 담보제도를 마련한 것….(김입삼, '초근목피에서 선진국으로의 증언', 한국경제신문사, 2003, 115~116쪽).
1961년 9월 13일, 이병철을 중심으로 한 기업가들이 외자도입 추진계획을 마련하여 군사정권 지도자 박정희에게 건의했다. 이 계획이 승인되어 민간 외자도입 교섭단이 결성되었다. 이병철이 대표를 맡은 미주 교섭단이 11월 2일, 이정림이 대표를 맡은 유럽 교섭단이 11월 8일 현지로 떠났다. 기업가들이 외자도입 제도를 만들어 군사정부를 이끈 것이다.
미주 교섭단은 현지에서 걸프 등 세계적인 기업들과 협상을 벌였다. 그 결과 걸프가 울산에 정유공장 투자를 결정했다. 독일로부터도 금성사, 한일시멘트, 쌍용시멘트 등이 2천500만 달러의 차관 교섭에 성공했다. 정부가 파견한 교섭단도 독일 정부와 발전설비 등 3천750만 달러의 재정 차관 협정을 체결했다.
이병철이 제안한 외자도입을 통한 수출주도형 공업화 전략을 수용한 박정희 군사정부는 전 행정력을 동원하여 이를 지원하여 성공시켰다. 이 전략은 이후 우리나라 경제 개발의 중추가 됐다. 한국이 이 전략을 통해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전까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시도하지 않았던 전인미답의 길이었다. 한국이 이를 성공시키자, 전 세계 후진국들은 한국의 방식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군 출신 지도자 박정희의 경제 가정교사가 되어 그의 머리에 공업화의 중요성, 수출산업화의 가능성을 주입한 주인공은 이병철이었다. 이것이 대구가 낳은 난세의 기업가 이병철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펜앤드마이크 대기자

        
    
    







                    
                    
                    
                    
                    




















댓글 많은 뉴스
나경원 "GPU 26만장이 李정부 성과? 성과위조·도둑질"
장동혁 "오늘 '李재판' 시작해야…사법부 영혼 팔아넘기게 될 것"
추미애 "국감 때 안구 실핏줄 터져 안과행, 고성·고함에 귀까지 먹먹해져 이비인후과행"
조국 "오세훈 당선, 제가 보고 싶겠나…내년 선거 피하지않아, 국힘 표 가져올 것"
강득구 "김현지 실장 국감 출석하려 했는데, 국힘이 배우자까지 부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