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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김성준] 사실 앞에 겸손해질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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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준 경북대 행정학부 교수

김성준 경북대 행정학부 교수
김성준 경북대 행정학부 교수

"사실이 바뀌면, 나는 내 생각을 바꾼다."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스(John Maynard Keynes)의 말로 알려진 이 격언은 사실 앞에서 유연하고 합리적인 사고를 갖는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누가 처음 이 말을 했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이 한마디가 우리와 정부에게 전하는 묵직한 메시지이다. 이 짧은 문장이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는 현대인이 가져야 할 생각의 유연성 혹은 지적 겸손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대부분 자신의 가치관, 신념, 상식에 부합하는 정보만을 받아들이는 성향이 강하다. 행동과학자들은 이를 '확증 편향'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자신의 틀을 깨뜨리는 정보와 마주하면 사실을 외면하거나 왜곡하려는 성향이 있다. 이 경구는 명백한 사실(fact) 앞에서 종래의 믿음을 과감히 수정할 줄 아는 과학적 태도와 유연한 사고의 가치를 일깨워준다.

이러한 생각의 유연성과 적응력은 무엇보다도 정부가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절실히 요구된다. 최근 대형마트 의무휴업 규제를 둘러싼 논란은 그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골목상권 보호라는 취지로 시작된 이 제도는 실제 현실에서 소비자 불편을 가중시키고 규제의 틈새를 노린 엉뚱한 유통 채널만 비대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낳았다. 실제로 대구광역시가 시민들의 편익과 실질적인 경제 효과를 고려해 휴업일을 평일로 전환하며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다시 공휴일로 묶어두려는 입법적인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는 변화된 데이터와 현장의 목소리보다 정책의 당위성만을 우선시한 결과이다. 결국 정책의 효과가 미미하다는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시대착오적인 규제에 매달리는 것은 정치적 명분을 지키기 위해 변화된 현실을 부정하는 오만에 가깝다.

사실을 외면한 정책의 대가는 전기요금 문제에서 더욱 가혹하게 나타난다. 우리나라는 연료비 변동을 요금에 반영하는 '원가 연동제'를 갖추고도, 물가 안정과 정치적 부담을 이유로 요금 조정을 미루어 왔다. 하지만 그 결과는 처참하다. 원가를 무시한 대가로 한국전력의 적자는 32조 원이 넘는 유례없는 수준으로 불어났다. 이는 한 기업의 부실을 넘어 국가 에너지 시스템 전체를 흔드는 시한폭탄이 된 것이다. 당장의 비판을 피하려는 정책은 미래 세대에게 막대한 부채와 이자 부담을 떠넘기는 무책임한 결과를 낳을 뿐이다. 원가라는 냉혹한 사실 대신 물가 안정이라는 당위성만 고수한 정책이 국가 경제의 근간을 어떻게 해치는지를 전기요금 정책은 뼈아픈 교훈을 남기고 있다.

정책의 성패는 명분과 구호가 아니라, 오직 결과라는 냉정한 성적표로 평가한다. 때로는 그 결과가 뼈아프고 불편할지라도, 외면할 수 없는 사실과 마주했을 때 종래의 노선을 과감히 수정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러한 개방적 사고야말로 정책 실패를 최소화하고 국민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만약 정부가 사실 앞에 겸손하지 못한 채 확증편향에 빠져 기존의 기조만을 강요한다면, 그 오만의 대가는 결국 막대한 사회적 비용과 국민의 고통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 자명하다. 이제는 이념이 아닌 데이터와 사실에 기반한 과학적 행정으로의 대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는 본성이 있으며, 이를 '소신'이라는 가치로 존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소신이 새로운 증거와 명백한 사실조차 거부하는 맹목적 아집으로 변질될 때 문제는 시작된다. 지혜로운 사람은 명확한 사실 앞에서 기꺼이 자기 생각을 수정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자명한 근거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는다. 인류의 역사는 변화하는 환경과 새로운 사실에 맞춰 끊임없이 자신을 혁신해 온 이들만이 생존하고 진화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정부의 진정한 덕목은 고집이 아닌 냉철한 현실 직시에 있어야 한다. 엄연한 사실이 기존 정책의 오류를 지목한다면, 미련 없이 노선을 수정하는 것이 현명한 국정 운영의 출발점이다.

물론 자신의 신념을 바꾸는 과정은 고통스럽고 지지층의 기대를 저버리는 듯한 압박을 줄 수 있다. 하지만 독선과 아집을 소신으로 착각하는 순간 정부는 방향 감각을 잃게 된다. 진정한 용기는 자존심을 지키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국익을 위해 과거의 오류를 인정하고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부정할 수 있는 결단에서 나온다. 국민이 진정으로 원하는 모습은 자존심에 매몰된 고집스러운 정부가 아니라, 비판적 자기성찰로 현실을 직시하고 책임을 다하는 정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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