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내남면 이조리엔 충의당(忠義堂)으로 불리는 오래된 건물이 있다. 경상북도 민속문화유산인 이 건축물은 조선 중기 무신인 정무공 최진립(1568∼1636) 장군의 종택이다. 대한민국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대표격인 경주 최부자 가문의 원류도 이곳이다.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경주최씨 정무공파 14대 종손 최채량(93) 옹은 평생을 교직에 몸담았던 교육자이자 서예가다. 1990년 선친의 건강 문제로 낙향한 뒤 30년 넘게 종손의 삶을 살고 있다.
그는 서른세 곳에 흩어져 있는 묘소를 한군데로 모으고, 정무공을 모시는 용산서원 향사도 두 번에서 한 번으로 줄이는 등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였다. 전통을 지키면서 형식을 간소화 해 후손이 더 친근하게 다가가게 한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170여 편에 이르는 비문·고유문 등의 글을 썼고 수십 점의 현판·비석 글씨를 남겼다. 지난 2014년엔 경주예술의전당에서 선친과 맏아들의 작품을 한데 모은 '3대 서예전'을 열었다. 지난해엔 '청풍루의 부활'이란 수필을 써서 '행복문학' 신인상을 받았다. 지난 20일엔 평생 써온 글을 모은 생애 첫 문집 '우산산고'를 펴냈다. 아흔을 넘긴 나이에도 매번 새로운 일을 찾아 도전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지난 30일 충의당에서 만난 최채량 옹은 구십대로 보기 어려울법한 정정한 모습으로 '충'(忠)과 '의'(義)의 가풍과, 종손으로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전했다.
-최진립 장군은 어떤 분인가. 최부자댁과는 어떻게 연결되나.
▶최진립 장군은 25세 때인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수차례 전투를 치르며 왜적을 무찔렀다. 27세에는 무과에 급제했고, 이후 여러 벼슬을 거치는 동안 한결같이 청백함이 알려져 나라로부터 여러 차례 칭찬을 받았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70세 노구로 군사를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달려가 전투를 치르다가 순절했다. 장군에게는 자헌대부 병조판서 벼슬이 내려졌고, 정무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청백리로 뽑힘과 아울러 용산서원에 제향과 '충렬사우'라는 사액까지 내려졌다. 지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충의당은 장군이 살았던 곳이다.
장군에겐 여섯 아들이 있었는데, 저는 맏아들(동윤)의 후손이다. 교촌 최부자 집안은 장군의 셋째 아들(동량)의 후손으로, 경주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최현식, 독립운동가 최준·최완 형제가 모두 최부자댁 사람들이다.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 선생은 넷째 아들(동길)의 후손이다.
-종손께서는 고려대 생물학과 출신이다. 그간의 이력으로 보자면 문과 출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생물학과를 택하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제가 대학에 들어갈 무렵은 6·25전쟁이 한창일 때였다. 이 시기 서울대나 연세대 등 다른 대학은 거의 다 부산에 있었는데 고려대만 대구에 내려와 있었다. 마침 집안 분이 대구에 계서서 고려대 국문과를 지원했지만 낙방했다. 보결로 들어가게 된 게 생물학과였다. 졸업 후엔 경주에서 교편을 잡았다. 국어·한문 교사 자격도 취득했다. 1973년부터는 서울로 전근해 성일중, 잠실중, 영동고 등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경주엔 언제 내려온 건가.
▶1980년대 후반쯤 선친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 고향으로 내려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공립학교에 근무한 탓에 자리가 나지 않아 근무지를 옮기는 게 쉽지 않았다. 차선책으로 택한 게 경주에서 그나마 가까운 부산이었다. 1988년의 일이다. 2년 뒤쯤 사립학교인 경주 삼성고등학교에 자리가 나면서 경주로 왔고 그곳에서 정년을 맞았다.
-배움에 대한 애착과 부지런함이 남다른 것 같다. 교직에 있으면서 생물교사가 국어과와 한문과의 자격시험에도 합격했고, 틈틈이 붓글씨를 익혀 글씨를 요청받는 수준에 이르렀다. 경주에 와서는 충의당에 서실을 만들고 주민들에게 붓글씨를 가르쳤다. 서예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제가 원래 왼손잡이였다. 부모님께서는 오른손잡이로 바꾸기 위해 왼손에 버선을 씌워둘 정도였다. 어느 날이었다. 종이와 붓을 팔러 다니는 어른 한 분이 집을 찾아왔다. 양쪽 손을 못 쓰는 분이었다. 그분이 선친 앞에서 붓을 입에 물고 글씨를 쓰는 모습을 봤다. 잘 쓴 글씨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큰 울림이 있었다. 그 후 노력이라도 해보자는 생각으로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10살 때의 일이다. 이후 한학자로 서예를 즐겼던 선친의 어깨너머로 붓글씨를 익혔다.
본격적으로 서예를 공부한 건 서울 생활을 하면서부터다. 서울에서 교사생활을 하며, 퇴근 후면 종로5가에 있는 서예학원을 다니는 생활을 10여년 했다. 주말엔 7, 8시간씩 계속 앉아 글씨만 썼다. 아마 다른 이들의 몇 배를 더 썼을 거다.
-공모전에 한 번쯤 도전해봤을 법도 한데.
▶어느 날 선생님께서 이만하면 국전에 도전해볼만하니 출품해보라고 했다. 그러면서 어느 정도 돈을 써야 입상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꺼냈다. 그 이야기를 듣고선 곧바로 '그렇게는 못 하겠다'고 잘라 말했다. 선조가 청백리인데 그런 부정을 저지르면서 입상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냐는 생각을 했다. 그 뒤부터는 공모전 도전 같은 건 아예 생각하지도 않았다.
제 글씨를 대중들에게 선보인 건 지난 2014년 '3대 서예전'이 유일하다. 한학자로 평생 종택을 지켜오면서 필묵으로 삶을 조율하고 언행을 닦아온 선친의 글씨를 묵혀두기 아깝다는 생각에서 벌인 일이었다. 늘 붓을 끼고 살았던 3대가 함께 하면 더욱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구순을 넘긴 나이에도 글을 써서 지난해 문학계간지 '행복문학' 신인상을 받았다. 최근엔 그동안 쓴 글을 모아 첫 개인문집도 펴냈다.
▶특별한 의미를 둔 건 아니다. 다만 해야 할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자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 같다.
신인상을 받은 수필 '청풍루의 부활'은 최진립 선생을 기리는 용산서원의 정문 격인 청풍루 중건 이야기를 소재로 삼아 쓴 글이다. 당시 심사위원들은 "기록이 없으면 기억할 수도, 기억되지도 않는다. 옛 선비들의 서권기와 올곧은 정신을 품은 작품"이라며 종손으로서 책임감을 안고 글을 이어가는 문필 활동에 대해 좋게 평가해주셨다. 감사한 일이다.
개인 문집은 뜻하지 않게 자식들에게 떠밀려 내게 됐다. 문집에 수록된 비문·기문 등은 모두 요청을 받아 쓴 글이다. 이 또한 제 삶의 기록이라는 생각에서 그 글을 모아뒀었는데, 그것들을 본 자식들의 권유에 못 이겨 책으로 엮게 됐다.
-종손의 삶을 살며 문중의 많은 변화를 이끌어냈다. 급변하는 시대에 맞춰 전통을 어떻게 지켜나갈 지에 대한 고민도 컸을 것 같다.
▶정년퇴직을 하고 문중의 일에 보다 집중하게 되다보니 개선해야 할 부분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는 모셔야 할 33위의 묘사를 지내는데만 꼬박 한 달이 걸렸다. 이런 이유로 각각 흩어져있는 묘소를 한데 모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문중 어른들 앞에서 말을 꺼냈더니 반대가 컸다. 제가 얘기했다. 만약 조상님들의 영혼이 있다고 가정하면, 한 가족이 이렇게 오순도순 음식을 나눠 먹을 수 있게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냐고 저에게 상을 줬으면 줬지 벌을 줄 일은 없을 것 같다고. 그런 설득 끝에 실행에 옮겼다. 2002년의 일이다.
봄과 가을 두 차례 지내던 향사도 전국에서 모이는 후손들에겐 큰 부담이었다. 전날 경주에 와서 새벽에 제사를 지내고 점심을 먹고 헤어지는 식이었으니. 결국 반대를 무릅쓰고 1차례로 줄였고 일정도 간소화했다.
그밖에 10여 차례 제사도 시간대를 옮기고 형식을 간소화했다. 먹지도 못 하는 옛 음식을 고집하지 말고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저녁 한 끼 먹을 만큼만 하도록 늘 며느리에게 당부한다. 비용도 딱 그만큼만 준다.
제사의 의미와 기본은 지키는 게 마땅하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다. 조상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지내야할 제사가 후손에게 고통이 된다면 그건 본뜻에서 멀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통과 현실 사이의 균형점을 찾아가는 게 종가를 이어가는 길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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