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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오의 대구경북의 집이야기] '달 가듯이' 걸어 시인의 집으로, 박목월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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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월 시인의 생가가 마치 시의 한 장면처럼 저만치 서 있다.
박목월 시인의 생가가 마치 시의 한 장면처럼 저만치 서 있다.

◆단석산이 품은 마을, 모량

저 멀리 단석산(斷石山, 827m)이 한눈에 들어온다.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 장군의 전설이 깃든 산이다. 이 땅의 산들은 한낱 풍경에 머물지 않고 사람의 발길을 마을로 이끈다. 산자락이 풀리는 곳에 너른 들판이 펼쳐지고 그 곁을 가로지르는 물길을 좇아 마을이 들어섰다.

단석산의 지세에 순응하며 터를 잡은 이곳의 이름은 모량(牟梁)이다. 신라 6부 중 하나였던 모량부의 터전이자, 유서 깊은 역사를 간직한 고장이다. 마을 가까이에는 금척리 고분군이 있다. 마을과 인접한 4번 국도를 따라 모여 있는 고분군은 모량이 결코 변방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신라 임금이 하늘에서 받은 금척(金尺, 금으로 된 자)을 감추기 위해 가짜 무덤을 숱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왕권의 상징인 금척을 품은 고분군이라 하니, 이곳이 오래전부터 찬연한 기억을 간직한 땅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시선은 단석산의 능선을 넘나들지만, 발걸음은 모량초등학교에서 시작한다. 교문 어귀와 길가에 줄지어 선 벚나무들은 4월의 풍경을 더없이 눈부시게 그려내고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가볍게 흩날리는 꽃잎을 바라보며, 이 계절을 온전히 마주할 수 있음에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든다. 시인 박목월의 생가가 있는 마을 안쪽으로 천천히 들어선다.

길이 완만하게 굽어지는 지점에서 표지판 하나를 만난다. '박목월 생가 400m'.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에 생가가 있다는 말이다. 수풀과 덩굴이 뒤엉킨 비탈에 허수아비처럼 선 표지판에 시선을 던진 후, 시인의 생가로 접어든다. 시인의 생가는 거창한 곳에 있지 않다. 소박한 길 위, 저만치에 시인의 생가는 봄의 숨결을 틔어내고 있다.

박목월 생가는 복원된 집이다. 2014년 모량리 집터에 다시 세워졌으니, 후손이 대를 이어 살거나 모진 풍파를 견뎌낸 고택은 아니다. 이런 까닭에 발걸음을 망설일 수도 있겠으나, 이내 마음을 고쳐먹는다. 중요한 것은 집이 지어진 시기가 아니다. 그 집을 향해 이어지는 사람들의 발길이다. 발길이 끊기면 집은 생명을 잃고, 이어지면 비로소 다시 살아 움직인다.

열린 문 너머로 들여다본 안채에는 단정한 시인의 서재가 놓여 있다.
열린 문 너머로 들여다본 안채에는 단정한 시인의 서재가 놓여 있다.

◆길은 외줄기, 시인의 집

생가를 배경으로 누군가 서 있다. 시인의 동상이다. 두 팔을 가볍게 교차한 채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그 시선이 가서 닿는 곳이 현세인지 내세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시인이란 '쓰는 자'이기 이전에 '보는 자'임을 깨닫는다. 그 시선이 닿는 곳마다 고운 한국어로 빚은 시들이 알뜰살뜰 피어났으리라 짐작해 본다. 동상 뒤편에는 황토색 초가지붕의 생가가 나그네를 기다리듯 놓여 있다.

담장 밖에서 마주한 생가는 온통 따스한 황토빛이다. 지붕과 담장, 안채와 사랑채가 모두 한 몸인 듯 어우러져 있다. 집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처럼 풍경 속에 녹아들고 있다. 이곳은 시인이 나고 자란 집이다. 그의 시적 감수성이 처음 깃들고 자라난 터다. 이 집은 보여주기 위해 세워진 것이 아니다. 잊힌 것들을 다시 되살리기 위해 들어섰다.

천천히 대문으로 발길을 옮긴다. 서두를 이유가 없다. 타지를 떠돌다 돌아온 사람처럼, 오래 그리워하던 집 앞에 이르는 마음이다. 담장 너머로 초가지붕이 가까워지고, 바람을 머금은 구름이 하늘에 머문다. 시 「윤사월」의 한 장면처럼, 어디선가 꾀꼬리 소리가 스며들 것만 같다. 이 집은 외딴곳에 놓여 있으되, 외롭지 않다. 자연과 기척을 주고받으며 조용히 글을 일구는 시인의 집이다.

대문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선다. 집은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작은 방앗간으로 이어진 정겨운 초가의 구성을 띠고 있다. 농촌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소박한 집이다. '부잣집' 특유의 으리으리한 기색은커녕, 오히려 가난했지만 정갈했던 시절의 기운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나그네의 갈증을 달래는 우물 속에는 조지훈과 박목월 시인의 우정이 고여 있다.
나그네의 갈증을 달래는 우물 속에는 조지훈과 박목월 시인의 우정이 고여 있다.

마침 이날, 생가를 찾는 이가 없었다. 나그네는 잠시 이 집을 혼자 누렸다. 마당 한가운데 가만히 서 있자니, 시인이 어린 시절 이 마당을 오가며 남긴 자취가 환상처럼 떠오르는 듯하다.

안채의 방문이 활짝 열려 있다. 시인의 내밀한 세계가 한눈에 들어온다. 머리가 닿을 듯 낮은 천장 아래 가로지른 서까래와 투박한 황토벽이 방 안의 공기를 아늑하게 감싸고 있다. 방 에 내걸린 시인의 초상이 나그네를 맞이하고, 그 아래로는 낡은 목가구들이 소담하게 놓여 있다.

가지런히 개어 올린 이부자리와 세월의 때가 묻은 궤짝들, 그리고 빼곡히 꽂힌 책들이 방 주인이 시인임을 말해준다. 시인의 체취가 밴 친필 원고들은 금방이라도 사각거리는 펜 소리가 들릴 듯 생생하여, 마치 시인이 방금 시를 쓰다 잠시 자리를 비운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안채와 사랑채를 지나 집 밖으로 나서면, 나그네정이라는 정자가 있고 아래로는 큼직한 돌들을 투박하게 쌓아 올린 우물이 놓여 있다. 낮은 키의 이 우물은 복원된 생가보다 더 오랜 세월을 견뎌온 듯하다. 낡은 나무 두레박과 어지러이 놓인 밧줄은 금방이라도 깊은 지층의 시원한 물을 지상으로 끌어올릴 기세다.

이 우물에는 시인 조지훈의 발자취가 어려 있다. 1946년의 어느 봄날, 그는 오로지 친구이자 동료인 박목월을 만나기 위해 기차에 몸을 싣고 멀리 경주 모량까지 내려왔다. 시를 쓰는 자는 시를 쓰는 자를 알아보는 법이다. 두 시인이 서로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던 그 길 끝에, 바로 이 우물이 놓여 있다.

먼 길을 달려온 지훈이 목월이 건네는 이 우물물로 갈증을 달랬을 모습을 상상해 본다. 시원한 물 한 모금이 목덜미를 적실 때, 두 사람 사이에는 굳이 말로 다 하지 않아도 좋을 우정이 맑게 차올랐을 것이다.

우물가에 서서 고개를 드니, 매화나무 가지 사이로 생가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꽃잎이 바람에 몸을 떨굴 때마다 그 사이로 비치는 생가는 어느덧 아스라한 풍경으로 뒤바뀐다. 저 집에서 시인의 삶만 시작된 게 아니다. 저 집은 척박한 시대를 견디며 피어난 우리말이 태어난 자리이기도 하다.

맑고 단정한, 때로는 눈물겨운 조선어의 정수들이 바로 이곳에서 길러졌다. 그래서인지 생가는 한 시인의 거처를 넘어, 청록파의 심상이 키워진 문학의 고향처럼 느껴진다. 문득 저 집이 '길은 외줄기'라 노래했던 시 구절처럼, 세상을 떠돌다 귀가한 나그네의 안식처 같기만 하다.

모량초등학교에는 박목월 시인의 시들이 순수한 얼굴로 노래하고 있다.
모량초등학교에는 박목월 시인의 시들이 순수한 얼굴로 노래하고 있다.

◆박목월의 시가 흐르는 모량초등학교

시인의 집을 뒤로 하고 마을 길을 걷는다. 들어올 때와는 다른 방향으로 길이 열린다. 인적 드문 길목마다 주인을 잃은 듯한 빈집들이 눈에 띄는데, 그 풍경이 시의 한 장면과 다름없다. 이처럼 모량 마을의 봄의 정경 속에는 사무치는 적요가 있다. 그렇게 길을 걷다 쑥을 캐러 나온 할머니 한 분을 만난다.

투박한 손에는 작은 호미가 들려 있고, 눈에는 낯선 나그네를 향한 순박한 호기심이 가득하다. "어디서 왔느냐"는 물음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이내 마을 이야기로, 다시 사람 사는 이야기로 번지다가 자연스레 손주 자랑으로 이어진다. 그러다 할머니는 문득 혼잣말처럼 덧붙이신다. 초등학교에 꼭 한번 가보라고. 그곳에 가면 목월의 시를 만날 수 있다고.

할머니의 말을 듣고 다시 학교로 향한다. 이번에는 학교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펼쳐진다. 담벼락이 없는 운동장 가에는 목월의 시를 새긴 소박한 목판이 줄지어 서 있다. 바닥에는 목련 꽃잎이 소복이 내려앉아 있고, 운동장에서 아이들은 다람쥐처럼 참새처럼 재재거리며 그네를 탄다.

시를 읽다가 다시 아이들을 바라본다. 시는 맑고, 아이들은 해맑다. 시인의 시는 생가에 머무르지 않고 이렇게 학교로, 아이들 곁으로 흘러든다. 고개를 숙이고 시를 천천히 읽는다. 바람이 가벼이 불자 꽃잎이 흔들린다. 운동장 위로 번지는 4월의 빛 속에서, 시와 아이들이 함께 어우러진다.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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