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 사자, 어린아이는 니체가 말한 인간 발전의 세 단계이다. 니체가 말한 낙타는 순종을 의미한다. 지금과 같은 교통수단이 없던 시절 카라반의 주축은 낙타였다. 그냥 걷기도 힘든 열사(熱沙)의 행로. 무거운 짐까지 지고 걷는 낙타는 그야말로 의무와 책임의 표상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호구지책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데에 영일이 없는 이 시대 장삼이사들을 낙타의 후예라 하면 망발일까. 물론 내공을 다지는 과정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 불에 달궈진 시우쇠를 두들기고 찬물에 집어넣는 대장장이의 의도는 명백하다. 좀더 강한 도구를 만들기 위함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부모나 교사로 대표되는 기득권층이나 사회규범은 노회한 대장장이다. 주목할 점은 시우쇠가 되든 낙타가 되든 공히 수동태에 속한다는 것이다.
사자는 저항 정신 혹은 꿋꿋한 줏대를 상징한다. 이 단계에 이른 인간은 일방적 지시나 폭압적 행위를 거부하는 용기와 기존체계를 뒤엎는 전복적 사고를 지녔다. 자유의 신봉자인 사자형 인간은 하지만 아쉽게도 창의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심하면 의지를 지켰으되 의리를 상실했으며 실존적 자유는 지켰으되 공존을 깨뜨리는 우를 범했다는 비판에 직면한다. 요컨대 그 자신이 극복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니체는 가장 바람직한 변신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유형을 든다. 어린아이는 한마디로 말해 긍정하는 인간이다. 자신의 욕망을 관철하기 위해 투쟁하는 존재가 사자라면 어린아이는 놀이하는 존재이다. 칼이나 송곳 같은 흉기를 들이대도 어린아이는 놀이의 한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웃는다. 주어진 게 무엇이든 기성인이 예상치 못한 방식의 놀이를 시현한다. 어린아이는 비교를 통해 자신을 억압하는 폐단에서 자유롭다. 한마디로 말해 어린아이는 창조와 긍정의 아이콘인 것이다.
니체의 의도를 부정할 생각은 전혀 없다. 어린아이처럼 긍정하고 창조하면서 살자는 게 왜 나쁜가. 그러니 니체의 말에 어깃장을 놓을 수밖에 없는 현실 상황이 안타깝다는 것이다. 니체 역시 작금의 세계를 목도한다면 수긍할 것이다. 그러니까 니체가 말한 어린아이는 더 이상 없다는 것. 일곱 살도 늦다며 네다섯 살 때부터 어학 공부를 시키고 천재는 만들기 나름이라는 기치 아래 아직 말이 어눌한 아이에게 건반을 누르게 하는 건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그건 일부 계층의 이야기라고? 그렇다면 주말이면 보충수업이다 학원숙제다 해서 평일보다 더 바쁜 어린아이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니체는 잘못이 없다. 물론 어린아이들도 잘못이 없다. 그렇다면 누구의 책임인가? 독자 여러분 스스로 답을 구해 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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