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6km에 달하는 순례길이 개통된 지 어느덧 10년. 칠곡군 왜관읍 곳곳을 오가는 '한티 가는 길'은 명실상부 칠곡군의 대표 숲길이 됐다. 개통 10주년을 맞이해, 좁다란 숲길에 담겨 있는 박해의 역사를 직접 걸어봤다.
놀랍게도 이 길의 역사는 고작 10년이 아니다. 1880년대 팔공산 자락에 천주교 신자들이 하나둘 생길 때부터, 신자들의 도망길을 따라 자연스럽게 오솔길이 생겼다. 박해를 피해서 도망쳐 온 신자들은 산길을 오르며 신앙심을 다졌다. 이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1984년부터 신나무골과 한티를 잇는 길 33km를 걷는 행사가 이뤄져 왔다.
시간이 흘러 2016년, 칠곡군청이 개청 100주년을 맞이해 이 길을 확장하고 '한티 가는 길'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됐다. 한국의 산티아고 순례길이라 불리는 한티 가는 길을 찾는 이들은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 5칸집에서 출발… 칠곡 가실성당
순례길의 첫 번째 관문은 가실성당이다. 경북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1895년 초대 주임 신부인 가밀로 파이아스 신부가 오면서 그 역사가 시작됐다. 당시에는 제대로 된 성당이 아니라, 5칸 기와집을 본당으로 사용했다. 대신 곳곳에 흩어진 공소를 들락날락하며 가르침을 전파했다.
위치도 쉽게 결정한 게 아니었다. 낙동강과 가까운 점은 천주교 가르침을 설파하는 데 제격이었다. 수로를 이용하면 안동과 대구, 부산까지도 쉽게 닿을 수 있었다. 낙동강 가까이에 있었음에도 6.25 전쟁 당시 이곳만큼은 평화로웠다. 남과 북 모두가 가실성당을 야전병원으로 사용해서다.
신로마네스크 형식으로 지은 건물의 외형도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다. 명동성당을 설계한 빅토르 루이 푸아넬 신부가 설계를 맡은 건물이다. 폭싹 속았수다 등 드라마 촬영지로도 입소문을 탔다.
이곳에 성순교 가문을 기리는 순교비가 자리하기도 했다. 창령 성씨 집안의 성섭이 먼저 천주교를 받아들인 후, 집안에 가르침을 나눴다. 그의 자손 중 하나인 성순교는 천주교 신앙을 실천하다, 경신박해 때 상주에서 순교했다고 알려져 있다.
◆ 기나긴 순교의 시작
이들의 순교 역사를 시작으로, 45.6km의 한티 가는 길 순례가 시작된다. 1815년부터 천주교 박해를 피해 숨은 신자들의 행선지를 담아낸 길이다. 총 5개 구간인 ▷돌아보는 길 ▷비우는 길 ▷뉘우치는 길 ▷용서의 길 ▷사랑의 길은 종점인 '한티 성지'에서 끝난다.
지난 25일 이 중 첫 번째 구간을 직접 걸어봤다. 신나무골 성지까지 10.5km의 '돌아보는 길' 순례는 5개 구간 중 가장 긴 코스로, 총 4시간 30분이 걸린다. 가실성당 옆으로 난 조그마한 문을 지나면 순례를 시작할 수 있다. 성당 주변 마을을 지나, 좁은 산길을 만나면 본격적인 고난이 시작된다. 라디오나 음악과 같은 즐길 거리를 전부 놓아두고 순례길에 올랐다.
첫 고비는 생각보다 일찍 찾아온다. 걸은 지 20분 만에 온몸에서 비 오듯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곳곳에 젖은 땅은 발목을 붙잡았고, 멋대로 난 나뭇가지를 헤쳐야 했다. 발목에 힘을 단단히 줘야만 오를 수 있는 오르막과 무릎을 시큰거리게 하는 내리막이 반복되면서 온몸이 지치게 된다. 뱀까지 지나가는 이 길에는 그 흔한 울타리조차 없다. 넘어지는 순간, 아무도 없는 이 순례길에서 고립된다는 공포감이 덮쳐온다.
그럴 때는 머리를 비우고 딱 2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길의 이름에 맞도록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볼 것, 그리고 파란색과 주황색으로 된 리본길을 따라갈 것. 길을 잃을까 쌍리본을 쫓다 보면, 잡생각이 들어설 틈이 없다. 힘들었던 점과 후회되는 일, 이 산에서 내려가면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 한참 돌아보다 보면 시간이 훌쩍 흐른다.
중간중간 순례길을 이겨낼 수 있는 평상도 준비돼 있다. 먹을거리를 준비한 이들은 구간 중간 부근에 있는 전망데크, 바람쉼터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다.
◆ 감시 피해 도자기 굽던 역사
한창 숲길을 걷다 보면 도암지에 도착한다. 한눈에 보이는 못에는 연꽃이 잔뜩 피어있고, 그 주변에 아기자기한 집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북쪽의 용소봉 정상이 바위로 돼 있어 암동이라고 불렸다. 그 이후 천주교 신자가 조정의 감시를 피해 와 도자기를 굽고 살았다고 해 '도암'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았다.
도암지로 가는 길목에는 그 역사를 담은 연화예술원이 있다. 옛 연화초등학교를 수리해 도자기 공예 체험을 할 수 있는 예술원으로 꾸렸다. 박해를 피한 신자들의 유일한 구명처였던 '도자기'는 이제 이 지역의 역사로 자리 잡았다. 예술원에는 초등학생들이 단체로 찾아와 도자기를 구워보고, 지역에 담긴 아픈 역사를 배우고 간다.
이제 종점이 멀지 않았지만, 마지막 산길을 오르기 전 재충전이 필요한 때다. 이를 위해 도암지 바로 앞에는 순례자를 위한 쉼터 정자가 마련돼 있다. 이곳 '양심 냉장고'에서는 시원한 생수와 아이스크림, 막걸리 등의 먹거리를 구매할 수 있다.
◆ 박해 피해 산으로… 신나무골 성지
냉장고를 지나쳐 다시 숲길로 들어서면 마지막 산길이 순례자를 기다리고 있다. 좁고 긴 골짜기에 난 길을 오르는 건 쉽지 않다. 숲길 구석에 조용히 자리 잡은 성녀상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또 1시간 남짓을 걸은 뒤에야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옥 성당을 만날 수 있다.
왜 이들 성지는 산자락에 자리했을까. 조선 조정의 박해를 피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산을 타는 것이었다. 천주교 신자들은 1815년 을해박해 때부터 신나무골에서 모여 산 것으로 추정했다. 지금은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이들은 골 곳곳에 임시 집을 세운 뒤 어깨를 맞부딪혀가며 열악하게 지냈다.
정착한 후에도 평탄하진 않았다. 1866년 병인박해로 인해 신나무골의 신자들은 또 도망길에 올랐다. 여러 차례 도망치고 또 도망치던 신자들은 한티와 신나무골 사이의 산길을 바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을 보고 "천주교 신자들은 축지법을 쓴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순교자 이선이의 묘는 그 당시 잔인한 박해의 역사를 상징한다. 그는 칠곡에 터를 잡고 살았는데, 경신박해 당시 박해를 피해 신나무골, 한티까지 숨어들었다. 그러나 결국 포졸들에게 들켜 목숨을 잃게 됐다. 포졸들은 신앙심을 포기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 했으나, 이선이와 그의 아들은 뜻을 굽히지 않아 순교했다. 지금은 안타깝게도 이선이의 묘만 남아 있다.
이 곳에 흉상으로 남은 로베르 신부는 특히 영남 지역 선교에 열과 성을 다한 인물이다. 그는 신나무골 거점으로 30년 넘게 선교에 헌신했다. 그는 연화서당이라고 불리는 학당을 이곳에 세우기도 했다. 학당은 1920년 첫 초등학교가 세워지기 전까지 아이들의 교육을 책임졌다.
45.6㎞의 길을 그저 걷기 좋은 숲길이라고만 하기는 어렵다. 군데군데 끊기듯 이어지는 산길과 울타리 하나 없는 비탈길은, 박해를 피해 숨어들었던 신자들의 막막함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고 길을 잃을 것 같은 순간이면 자연스레 파란색과 주황색 리본부터 찾게 된다. 작은 리본 하나를 보고 안도하게 되는 그 순간, 당시 신자들도 보이지 않는 믿음 하나를 붙들고 이 산길을 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한티 가는 길은 종교 순례길이자, 자신을 돌아보는 사색의 길이다. 이 길은 200년 전 사람들의 발자국 위에 오늘의 사람들이 다시 발을 얹으며 이어지고 있다. (2편에 계속)

































댓글 많은 뉴스
李대통령 "저질들에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투표하셨나요"
'눈물 호소' 김부겸 vs '경제 강조' 추경호…대구시장 선거 막판 총력전
뜨거웠던 지선 끝나면, 여야 정치권에 '후폭풍' 몰려온다
李대통령 "빚때문에 가족 끌어안고 죽을 정도면 파산·면책 해줘야"
홍준표 "박근혜, 비대위원장 하려고 전국 도나…왜 저러는지 이해안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