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전 참전 당시 날아든 수류탄에 오른쪽 다리를 잃은 박태식(79) 씨는 오늘 하루도 의족에 몸을 의지한 채 시작한다. 집 안을 걸을 때도 절뚝이는 걸음은 쉽게 숨길 수 없다. 의족이 닿는 절단 부위는 늘 짓눌린 듯 아프고, 남은 왼쪽 다리는 수십 년 동안 체중을 견디느라 관절이 닳아버렸다. 그는 "아침마다 진통제를 맞지 않으면 생활 자체가 안 된다"고 말했다.
박 씨에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56년 전 베트남 전장에서 잃어버린 다리는 물론이고, 악몽과 통증,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도 여전히 그의 곁에 남아 있다. 스물두 살 청년이었던 그는 나라의 명령으로 전쟁터에 갔다가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안고 돌아왔다.
◆ "수류탄이 발 앞에 떨어졌다"
박 씨는 1969년 대구 50사단에서 복무하던 중 월남 파병 명령을 받았다. 당시 나이는 21세였다. 그는 신병교육대 조교와 사격장 관리 업무를 맡고 있었지만 강제 차출이었던 탓에 선택권은 없었다.
파병 전 받은 교육은 강원도 양구 인근에서 진행된 2주 과정이 전부였다. 사격과 수류탄 투척 등 기본 훈련을 마친 뒤 그는 베트남행 배에 올랐다.
1969년 10월 30일 베트남 나트랑에 도착한 그는 투이호아 지역 백마부대 2대대 5중대 3소대 화기분대장으로 배치됐다. 10명의 분대원을 이끄는 하사였다.
박 씨의 주된 임무는 매복 작전이었다. 베트콩이 출몰할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에 미리 숨어 있다가 적이 나타나면 공격하는 방식이었다. 좌표를 확인해 포병 지원을 요청하고, 적의 이동 경로에는 크레모아 지뢰를 설치했다.
"매복 지점마다 번호가 있었어요. 지도 들고 지정된 장소에 숨어 있다가 적이 나타나면 포병 지원도 받고 공격도 했죠."
작전이 반복될수록 긴장은 일상이 됐다. 행군의 가장 앞에서 경계·수색을 담당하는 첨병으로 나아가야 할 때도 많았다. 적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선두에 서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두려움이 컸다.
1970년 3월 29일 정오 무렵, 운명을 바꾼 순간이 찾아왔다. 매복 작전을 위해 자리를 잡던 중 갑작스럽게 총격전이 벌어졌다. 수류탄이 오가고 포성이 이어졌다.
"검은색 수류탄 하나가 발 앞에 떨어졌어요. 발로 차내고 엎드리려 했는데 눈앞에서 터졌습니다."
눈 깜짝할 새 그는 오른쪽 다리를 잃었다. 처음에는 통증조차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피가 쏟아졌고 분대원들이 압박붕대로 응급처치를 시작했다. 총격이 계속되는 탓에 구조 헬기도 쉽게 착륙하지 못했다. 소대장이 포병 지원을 요청해 적의 공격을 막은 뒤에야 그는 후송될 수 있었다.
병원으로 이송된 박 씨는 결국 무릎 아래까지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파편과 폭약균 감염으로 상처가 곪아들어 갔기 때문이다.
"눈을 뜨니 다리가 없더라고요. 그때가 스물두 살이었습니다."
◆ 다리를 잃고 돌아온 청년…끝나지 않은 전쟁
베트남 전장에서 다리를 잃고 귀국한 박 씨를 기다린 것은 영웅에 대한 예우보다 냉혹한 현실이었다.
그는 의족을 착용한 채 다시 걷는 법을 배워야 했다. 대구 효목동 육군통합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뒤 부산의 한 병원에서 의족을 맞췄고, 걷기 연습에만 1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신체적 장애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앞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막막함이었다.
"다리가 없어진 순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것이었죠. 또래처럼 돈을 벌어 먹고살 수 있을지 모든 것이 캄캄했습니다."
국가유공자로 지정돼 취업 지원을 받기도 했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직장에 들어가도 장애를 이유로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고 오래 버티지 못하는 일이 반복됐다.
어디를 가더라도 '장애인'이라는 말이 꼬리를 물었다. 동료들은 박 씨를 향해 다리 없는 사람이라고 수군거렸고 때로는 조롱거리로 여겼다.
김천 출신이었던 박 씨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몸을 다쳤다는 사실에 주변의 시선이 두려워졌기 때문이다. 결국 연고도 없는 대구에 정착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가장 큰 상처로 남은 기억은 대중목욕탕이다. 의족을 벗고 목욕탕을 이용할 때마다 차가운 시선을 감당해야 했다.
"의족을 벗고 탕에 들어가려면 기어서 가야 해요. 하루는 탕에 있던 사람이 '재수 없다'고 말했죠. 그 말을 들은 이후부터 목욕탕에는 가지 않아요."
육체적 고통도 현재진행형이다. 절단된 부위가 없는데도 통증이 느껴지는 환상통에 수십 년째 시달리고 있다.
고단한 피로에 잠에 들었다가도 통증이 몰려오기도 한다. 새벽에 병원을 급하게 찾아 진통제를 맞고 돌아오거나 울면서 밤을 지새우는 날도 적지 않다.
전쟁의 기억 역시 그를 놓아주지 않고 있다. 사고 이후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증상은 여전하다.
"지금도 월남전 꿈을 꾸다가 깨면 식은땀으로 온몸이 젖습니다. 검은 돌멩이만 봐도 당시 눈앞에서 터진 수류탄이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의족을 착용한 채 살아온 세월도 어느덧 50년이 넘었다. 그러나 의족은 또 다른 신체적 부담을 안겼다. 체중이 한쪽 다리에 집중되면서 관절이 닳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전 참전 공로로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박 씨는 나라의 부름을 받고 희생했다는 자부심을 느끼는 동시에, 마음 속 씁쓸함도 자욱하기만 하다. 무공훈장과 다리 하나를 바꿨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다.
박 씨가 바라는 건 자신처럼 나라의 부름을 받고 다친 상이군경들을 위한 따뜻한 관심이다.
"우리가 바라는 건 특별한 대우가 아닙니다. 보훈의 달인 6월에만 국가유공자를 찾을 게 아니라, 나라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줬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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