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고] 투표용지가 모자란 민주주의, 선관위는 국민 앞에 답하라

로봇
mWiz 이 기사 포인트

이인곤 전 호서대학교 법경찰행정학과 교수

이인곤전 호서대 법경찰행정학과 교수
이인곤전 호서대 법경찰행정학과 교수

투표용지가 모자랐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선거 현장에서, 유권자가 한 표를 행사하기 위해 투표소를 찾았으나 국가는 그 한 표를 받을 준비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것은 단순한 행정 착오가 아니다. 국민주권이 실현되는 가장 엄숙한 현장에서 국가기관이 국민 앞에 드러낸 중대한 헌법적 실패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심장이다. 국민은 투표소에서 한 장의 투표용지를 받아 들고 국가권력의 향방을 정한다. 그 종이 한 장은 단순한 인쇄물이 아니다. 헌법 제1조가 선언한 국민주권의 증서이고, 헌법 제24조가 보장한 선거권의 현실적 형태다. 그런데 그 투표용지가 부족했다. 이는 물품 관리의 실수가 아니라, 국민의 권리 앞에서 국가의 준비와 긴장이 무너진 사건이다.

헌법상 선거권은 국민 개인의 권리인 동시에 민주주의 질서를 떠받치는 공적 가치다. 선거의 정당성은 개표 결과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국민이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불안과 혼란 없이 한 표를 행사할 수 있어야 비로소 선거는 정당하다. 절차가 흔들리면 결과도 상처를 입는다. 투표용지가 부족한 선거는 그 자체로 선거관리의 가장 기초적인 신뢰를 무너뜨린다.

선거관리위원회는 헌법이 특별히 설치한 독립기관이다. 그러나 독립은 책임을 피하는 방패가 아니다. 독립은 더 높은 책임을 요구하는 헌법적 명령이다.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는 말은 국민 앞에서도 독립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다. 선관위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정권도, 정당도, 언론도 아니다. 오직 국민이어야 한다.

선관위원장의 사과만으로는 부족하다. 선관위는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누가 어떤 기준으로 투표용지를 준비했는지, 부족 사태 발생 후 보고와 이송은 왜 늦었는지, 기다리다 돌아간 유권자는 없었는지, 있었다면 그 권리 침해를 어떻게 확인하고 책임질 것인지 낱낱이 밝혀야 한다. 국민은 위로가 아니라 진실을 요구한다.

행정부와 정치권도 책임에서 비켜설 수 없다. 선관위의 독립성을 이유로 "우리가 관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헌법적 책임을 너무 좁게 이해하는 태도다. 선거가 흔들리면 국가 전체의 정당성이 흔들린다. 정부와 국회는 선관위를 압박하라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법과 제도를 재정비할 책임이 있다. 독립기관의 책임과 국가의 책임은 서로를 지워주는 관계가 아니다. 국민 앞에서는 모두가 함께 답해야 한다. 선관위의 전면 쇄신을 요구하는 국민의 분노를 가볍게 들어서는 안 된다.

필요한 것은 뼈를 깎는 각성이다. 중앙선관위는 문제 발생 투표소별 준비 수량, 부족 발생 시각, 추가 이송 시각, 대기 인원, 투표 포기 신고 여부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책임자 문책은 형식적 경고에 그쳐서는 안 된다. 국회는 투표용지 작성·보관·배분·긴급 이송 체계를 법률과 규칙 차원에서 재점검해야 한다. "투표용지가 모자라 투표를 못 했다"는 말이 다시는 대한민국 선거에서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한 사람의 유권자로서, 그리고 법을 가르쳐 온 사람으로서 이 사건은 참담하다. 국민은 거창한 특권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정해진 날 투표소에 가서 자신의 한 표를 행사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국가는 그 가장 기본적인 약속을 흔들었다. 국민이 "이게 나라냐"고 탄식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탄식은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헌법적 절규다.

민주주의는 선거일 하루에 완성되지 않는다. 그러나 선거일 하루가 무너지면 민주주의 전체가 의심받는다. 투표용지가 모자란 선거는 행정 실패를 넘어 국민주권에 남은 깊은 상처다. 선관위는 국민 앞에 고개 숙이는 데서 그치지 말고, 뼈를 깎는 제도 개혁으로 답해야 한다. 민주공화국의 주인은 국민이다. 그 국민의 한 표 앞에서 국가는 다시 겸손을 배워야 한다.

0700
AI 뉴스브리핑
정치 경제 사회 국제
6·3 지방선거 이후 여론조사에서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이 사실상 동률을 기록했으며, 이재명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도는 4%포인트...
대구교통공사(DTRO)의 수익성이 전국 6개 도시철도공사 중 최하위권으로 나타났으며, 요금 현실화율이 35.1%에 그쳐 운영비를 충당하기 어...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6·3 지방선거 본투표일인 지난 3일, 투표용지 부족으로 추가 송부가 이루어진 투표소가 140곳에 달하며, 이로 인해 2...
이스라엘은 8일(현지시간) 이란 본토에 대한 공습을 단행하며, 이는 이란의 이스라엘 미사일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나타났다. 이란은 이스라엘에..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