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여름, 서울과 평양 사이 전화선이 다시 연결됐다. 남과 북은 분단 이후 처음으로 서로를 향해 "대화하자"고 말했다. 정부는 '북괴' 대신 '북한'이라는 공식 호칭을 쓰기 시작했고, 시민들 사이에서는 "정말 통일 분위기가 오는 것 아니냐"는 기대도 퍼졌다.
하지만 그해 가을, 국회는 해산됐다. 헌법 기능은 정지됐고,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체제를 선포했다. 평화와 화해의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 1972년은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현대사의 가장 강력한 권위주의 체제가 문을 연 해이기도 했다.
◆ 7·4 남북공동성명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지난 5월 평양에 다녀왔습니다" 1972년 7월 4일, 중앙정보부에서 열린 기자회견장.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뜻밖의 사실을 공개했다. 그리고 같은 시각 북한에서도 동일한 내용의 성명이 발표되고 있었다.
남과 북이 분단 이후 처음으로 공동 합의문을 발표한 순간이었다. 이른바 '7·4 남북공동성명'. 남북은 이 성명을 통해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이라는 통일 3대 원칙에 합의했다.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 민족 스스로 통일 문제를 해결하며, 무력이 아닌 평화적 방법으로 체제와 이념 차이를 넘어 협력하자는 내용이었다.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합의였다. 남북은 상호 비방과 무장 도발을 자제하고 교류와 협력을 확대하기로 했다.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한 적십자회담 추진, 서울~평양 간 직통전화 설치, 남북조절위원회 구성 등의 내용도 담겼다. 정부는 성명 발표 다음 날인 7월 5일부터 공식 호칭 역시 기존 '북괴' 대신 '북한'으로 변경했다.
실제로 그해 8월에는 서울~평양 간 전화가 27년 만에 개통됐고, 남북 적십자 대표단이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회담을 진행했다. 시민들 사이에서는 "정말 통일 분위기가 오는 것 아니냐"는 기대감도 퍼졌다.
7·4 공동성명은 이후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와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등 남북 대화의 출발점이 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 1972년 10월, 유신
하지만 평화의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7·4 공동성명이 발표된 지 불과 석 달 뒤인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당시 박 대통령은 특별선언을 통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개혁이 이뤄질 수 없다"며 전국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회는 해산됐고 정당 및 정치활동도 중지됐다. 이후 비상국무회의를 중심으로 새 헌법 개정안이 마련됐고, 같은 해 11월 국민투표를 거쳐 유신헌법이 확정됐다.
유신체제는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였다. 대통령 간선제와 긴급조치권, 국회 해산권 등이 포함되며 권한은 크게 강화됐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국내외적으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1969년 발표된 닉슨 독트린 이후 주한미군 감축 가능성이 거론됐고, 미·중 관계 개선 움직임도 본격화됐다. 북한 역시 1968년 1·21 사태와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등을 벌이며 군사적 긴장을 높이고 있었다. 국내 상황도 불안했다. 고도성장 속에서도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 갈등은 커지고 있었다. 1970년 전태일 열사 분신 사건,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 등 사회적 충격도 이어졌다. 여기에 1971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와 접전을 벌이며 정치적 위기감도 높아졌다.
결국 박정희 정권은 안보 위기와 정치 불안을 명분으로 더욱 강력한 통치체제를 선택하게 된다.
◆ 화해의 시대? 독재의 출발점?
1972년은 한편으로는 남북 대화와 화해 분위기가 무르익었던 해였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 권위주의 체제인 유신이 시작된 해이기도 했다.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7·4 남북공동성명은 단순한 화해의 상징만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평가도 나온다. 남북 모두 내부 체제 결속과 권력 강화를 위해 대화 국면을 활용했다는 시각이다. 실제 남한은 같은 해 10월 유신체제로 들어갔고, 북한 역시 12월 사회주의헌법 개정을 통해 주체사상을 명문화하며 권력 집중 체제를 강화했다.
당시에도 7·4 공동성명이 정치적 목적에 활용된 것 아니냐는 비판은 존재했다. 남북 모두 체제 경쟁 속에서 대화를 선전 효과와 내부 결속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것이다.
결국 성명 이후의 합의들도 대부분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이산가족 상봉은 실제로 성사되지 못했고, 남북조절위원회 역시 뚜렷한 성과 없이 중단됐다. 평화와 통일의 기대가 커졌던 1972년. 그러나 그해 한국 사회는 동시에 더 강한 통제의 시대로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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