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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규의 장소의 사색] 학봉(鶴峰)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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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포만 쪽에서 바라본 학봉. 구름모자를 쓰고 있다.
합포만 쪽에서 바라본 학봉. 구름모자를 쓰고 있다.

보통 사춘기를 전기와 후기로 나눈다. 전기는 중학생 시절, 후기는 고등학생 시절이 되는 게 일반적이다. 나이로 보면 14~16세가 전기 사춘기, 17~19세가 후기 사춘기다. 이번에 할 무학산 학봉 이야기는 개인적으로는 전기 사춘기와 관련된 것이다.

며칠 전 부부가 함께 창원에 사는 친구 집을 다녀왔다. 오랜만에 마산의 가포(예전에는 해
수욕장이었으나 지금은 마산 신항이 되어 있음) 너머로 바다 바람을 쐬고 왔다. 친구는 진해에 집필실 하나를 두기를 권했다. 그 핑계로 자주 보자는 이야기였다. 진해에는 아직 고즈넉한 내항(內港)의 향취가 남아 있다.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잔잔한 물결 눈에 어리네~"라고 노산 이은상이 노래했던 합포만의 옛 정경이 지금은 진해에 남아 있다. "집사람이 손자 보러 서울 가면 나는 여기로 내려와서 글이나 써야 겠네"라고 말했더니 친구 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뭣하러 이 먼 곳까지 오세요? 아무도 없는 집을 진해 삼아 맘 편히 쓰시면 되죠."라고 말해서 모두 깔깔대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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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따라서 같이 웃다가 이건 아닌데 싶어서 웃음을 그쳤다. 진해가 집필실 두기에 좋은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바다를 바라보는 남향의 양지바른 곳에 눈여겨 본 가성비 좋은 작은 아파트가 있다. 진해는 집값이 안정되어 있어서 한 채 마련하는데 큰 부담이 없다. 둘째, 마음만 먹으면 마창대교를 건너 마산으로 쉽게 들어갈 수가 있다. 가포로, 무학산(학봉)으로, 합포만으로, 언제든지 내 사춘기로 타임슬립(시간이동)이 가능하다. 마창대교는 내 내면에 형성되어 있는 마산 아비투스(정체성을 구성하는 문화조건)의 양면성을 그대로 반영한다. 다리 위에 올라서면 그냥 망망대해 위에 떠서 저 멀리 마산 시가지
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그 정경이 멋지다. 누구나 감탄한다.

그런데 좀 무섭다. 나만 그런게 아니었는지 이번에 가 보니 다리 난간을 위로 조금 덧대었다. 그래선지 예전보다는 좀 덜 무서웠다. 대교 위에서는 합포만 일대가 일제히 눈 아래로 펼쳐지고 저 멀리 무학산(舞鶴山) 학봉(鶴峰)이 마치 미니어쳐처럼 앙증맞게 축소되어 보인다. 그래서 더 정겹다. 내가 집필실을 이쪽에 두려는 진짜 이유는 바로 사실 이 학봉 때문이다. 마산의 무학산 학봉은 소문난 문필봉(文筆峰)이다. 그 아래에 머물던 사람들 중에서 유명한 학자, 문인이 많이 배출되었다. 임화, 백석, 김춘수, 김남조, 천상병, 이제하, 이은상, 김윤식(비평), 강제규(영화) 같은 분들이 그 아래서 거주했거나(임화) 혹은 어슬렁거렸거나(백석) 젊어서 직장 생활을 했거나(김춘수, 김남조) 학교를 다녔다(천상병, 이제하, 이은상, 김윤식, 강제규). 굳이 나까지 들먹일 생각은 없었지만 나 역시 학봉 아래서 학교를 다니고 그 아래를 십여 년 간 어슬렁거렸던 사람이다. 최근 인물로는 《마산》이라는 장편소설로 동인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김기창도 있다. 이청준, 한승원, 한강, 송기숙, 이승우 등 대한민국을 대표할 만한 소문난 작가들을 배출한 전남 장흥의 천관산(天冠山)에 버금가는 문필봉이다.

마산중에서 마산고를 향해 올라가는 언덕길. 예전에는 훨씬 가팔랐다
마산중에서 마산고를 향해 올라가는 언덕길. 예전에는 훨씬 가팔랐다

마산에서는 무학이라는 말이 하나의 지역 대표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마산=무학'이라는 등식이 자연스럽게 성립한다. 무학산, 합포만, 몽고정, 3.15 등이 이를테면 마산을 상징하는 단어들이다 산업화와 관련지어서는 몽고간장, 무학소주, 한일합섬, 수출자유지역 등이 민주화와 관련지어서는 부마민중항쟁이 마산과 친연성이 있는 단어들이다. 그런데 마산의 그 '무학'이 일본에도 있다. 교토 인근의 마이즈루만이라는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이즈루(舞鶴)시가 그 곳이다. 우리말로 '무학'시다. 이 지명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유명한 소설 '금각사'(金閣寺)의 서두에 등장한다. 소설 주인공이 중학교에 들 무렵 아버지 곁을 떠나 고향의 숙부집에 가서 성장하는데 그곳이 바로 마이즈루(舞鶴)시의 동쪽 근교에 위치한 시라쿠라는 마을이다. 아버지의 근무처인 나리우 곶의 작은 절 근처에는 다닐 만한 중학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산 명물 몽고정
마산 명물 몽고정

노벨문학상을 받을 뻔했던 '금각사'(金閣寺)라는 소설은 마이즈루(舞鶴)와 관련된 소년기 기억에 대한 회고로 시작한다. 마산의 무학과 교토의 마이즈루는 공히 내게 문학적 영감을 선사하는 단어들이다. 묘하게 한 짝이 되어 상상력에 동력을 제공한다. 그 두 장소를 따로 접했기에(마이즈루가 무학이라는 것을 한참 뒤에 알았다) 처음부터 그것들을 하나의 의미와 정서로 병합하지는 못했다. 시간이 흐르고 우연한 기회에 그 둘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 자세한 내용은 훗날 작성될 '장소의 사색-마이즈루 편'에서 말씀드릴 예정이다), 어쨌든 전기 사춘기를 보낸 마산의 학봉과 후기 사춘기 때 만난 '금각사'(金閣寺)의 마이즈루는 내 소설가적 상상력의 원초적 산실(産室)이 되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다.

마산고 교정의 왕벚꽃나무들
마산고 교정의 왕벚꽃나무들

마산에서 만난 최초의 미적 체험에 대해서는 소설이나 에세이 등 전작(前作)들에서 누차 밝힌 바가 있다. 오늘은 학봉과 관련지어 그 이야기를 한 번 해볼까 한다.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었다. 그날도 친구집을 향해서 터벅터벅 걸어가던 중이었다. 중3에 올라가자마자 같은 반 친구가 자기 집에서 숙식을 같이 하며 공부를 할 수 없겠느냐고 물어왔다. 좋다고 했다. 친구집은 우리가 다니던 중학교와 담하나 간격으로 나란히 자리잡은 고등학교의 높은 축대가 끝나는 길목에 있었다. 길 건너 신작로에 면해 있는 꽤 큰 왜식 적산가옥이었다. 학교에서 나와 옆 고등학교 축대 아래를 거쳐 신작로로 나가는 길은 좁고 급한 오르막길이었다. 보통은 허리를 접고 땅을 보고 걸었다. 여느 날처럼 땅만 쳐다보고 걷고 있다가 느낌이 이상해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무심코 바라본 하늘에서는 여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비교불가의 화려한 군무(群舞)가 찬란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문자 그대로 일대 장관이었다. 처음에는 새뗀가 싶었다. 무엇인가 살아있는 것들이, 반짝거리는 수많은 작은 날개들이, 집단적으로 원을 그리며, 일제히 바다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푸른 하늘을 바탕 삼아서 펼쳐지는 연분홍 벚꽃들의 화려한 군무였다. 새떼처럼 몰려다니며 바람의 회전을 따라서 몇 번씩이고 곡예를 선보이고 있는 중이었다. 가히 일사불란하고 주도면밀하게 창공을 마음껏 유린하고 있었다.

마산고 3.15 열사 추모 동산
마산고 3.15 열사 추모 동산

그 광경을 보는 순간, 순간적으로 모든 사고가 정지되는 것 같았다. 세상에, 저렇게 아름다운 것이 있을 수가 있구나, 오직 그 생각만으로 황홀해지는 것이었다. 왕벚꽃나무의 저 거칠고 시커먼 몸통에서, 저토록 가여린 연분홍 살점들이 사정없이 뚝뚝 떨어져 날아다니는 것부터가 신비로웠다. 세상에 이런 일도 벌어지는구나, 생전 처음 보는 압도적인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망연히 서서 생각한 게 딱 하나 있었다. 아, 이렇게 세상은 아름다운 거구나, 내게도 저렇게 아름다운 세상이 허락되는구나, 하늘은 눈이 시도록 푸르고 내 눈에서는 예고도 없이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그날이 내가 세계와의 첫사랑, 그 황홀한 유미주의를 최초로 만나는 날이었다. 내가 학봉을 나의 문필봉으로 굳게 믿게 된 것도 바로 그날의 미적 체험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소설가·대구교육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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