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사학의 주장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 문제는 오랫동안 한국 고대사의 쟁점이 되어 왔다. 이병도는 『한국사-고대편-』(진단학회,1972)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낙랑군의 치소(治所) 즉 그 수현(首縣)은 조선현이니 동현(同縣)의 소재지는 지금 대동강 남안(南岸), 낙랑유적(특히 무수한 고분(古墳))으로써 변만(遍滿)한 대동강면 토성리 일대였다. 그 토성의 유지(遺址)가 바로 조선현치요 또 낙랑태수의 관아가 있던 곳이다."
이병도는 대동강 남안 토성리 일대를 낙랑군의 중심지 조선현으로 보았다. 그 근거로써 낙랑태수장(樂浪太守章), 조선우위(朝鮮右尉) 등의 글자를 새긴 봉니(封泥)가 거기서 발견된 점을 지적했으나 그것을 뒷받침할 문헌적 근거는 단 하나도 제시하지 못했다.
이병도의 논리는 그 후 반도사학에 의해 그대로 계승되었는데 『한국사신론』(일조각, 2005)에 보이는 이기백의 주장은 그것을 잘 대변한다.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의 고조선 지방, 진번군이 자비령 이남·한강 이북의 옛 진번 지방, 임둔군이 함남의 옛 임둔 지방, 현도군이 압록강 중류·동가강 유역의 예 지방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병도, 이기백은 한무제가 공격한 고조선은 대동강 유역에 그 중심지가 있었고 따라서 저들이 설치한 한사군 또한 모두 한강 이북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 뒤 노태돈은 『한국고대사』(경세원, 2016)에서 "낙랑군 25개 현이 대부분 대동강과 재령강 수로 변에 분포한다."라고 말하여 이병도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민족사학의 주장
신채호는 『조선상고사』(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1990)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번한, 패수, 왕검성 등 위씨(衛氏)의 근거지가 지금 해성(海城), 개평(蓋平) 등지이다."
"한사군의 위치는 지금 요동반도 이내에 구할 뿐이다."
신채호는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하 동쪽 해성시 일대에 있었다고 믿었기 때문에 한사군의 위치를 지금 요동반도 이내에서 찾았다.
정인보는 『조선사연구 상』(연세대학교 출판부, 1983)에서 낙랑 봉니가 위조된 증거로서 낙랑대윤장(樂浪大尹章)을 들었다. 대윤은 왕망시대 관직이고 한나라 시대는 태수라 호칭했다. 왕망 때는 낙랑군을 낙선군으로 명칭을 바꾸었으므로 낙선대윤장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에 부합된다. 그런데 낙랑대윤장이라고 한 것은 명백한 위조의 증거란 것이다.
그리고 토성리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 낙랑예관(樂浪禮官)이란 와당(瓦當)이 있는데 한나라 제도에 예관이란 관직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정인보는 이러한 몇 가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서 대동강 토성리유물은 일제가 위조한 것이라고 통렬히 비판했다.
다만 정인보는 "설찬(薛瓚)의 말한 바 왕검성은 패수의 동쪽에 있은즉 패수는 곧 왕검성의 서쪽이니 지금 봉천의 해성현 서남쪽에 있는 어니하(淤泥河)가 이 물이다"라고 말했다. 지금 요녕성 해성시 일대를 낙랑군의 중심지 조선현으로 추정한 것을 알 수 있다.
북한의 리지린은 『고조선연구』(과학원출판사, 1963)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능하를 국경선인 패수로, 어니하(淤泥河)를 왕검성의 패수로 인정할 수 있는 근거가 충분하다고 인정하기 때문에 필자는 왕검성을 오늘의 개평으로 비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인정되게 된다."
오늘날의 요녕성 개주시를 고조선의 왕검성으로 인정한 리지린의 주장도 큰 틀에서 신채호, 정인보의 견해를 벗어나지 않았다.
윤내현은 『한국고대사신론』(일지사, 1991)에서 "낙랑군은 한사군 가운데 가장 서남부에 위치하여 지금의 난하 하류 동부 연안에 있었는데 낙랑군에 속해 있었던 25개 현 가운데 수성현은 지금의 하북성 창려현의 갈석 에 조선현은 그곳과 근접된 난하 중하류 동부 연안에 있었다"라고 하였다.
민족사학의 낙랑군 조선현에 대한 인식을 종합 검토해보면 신채호, 정인보, 리지린은 요하 동쪽 개주시 일대로 파악하였고 윤내현은 요하 서쪽 난하 중하류 일대로 추정하였다.
이병도를 위시한 반도사학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고조선의 강역을 인식했다면 민족사학은 그 강역을 확대하여 요동반도를 중심으로 고조선의 위치를 파악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문헌적으로 본 낙랑군 조선현
송나라 때 낙사가 쓴 『태평환우기』는 하북도 평주 노룡현 조항에서 "조선성은 바로 기자가 봉함을 받은 지역이다. 지금도 황폐한 성이 남아 있다.(朝鮮城 卽箕子受封之地 今有廢城)"라고 하였다.
이 기록은 우리에게 다음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첫째 은나라가 망하자 은나라 태사였던 기자가 망명한 곳은 대동강 유역 조선이 아닌 하북도 평주 노룡현에 있던 조선이었다는 것이다.
둘째 노룡현의 조선성 유적은 낙사가 『태평환우기』를 저술하던 송나라 당시까지도 황폐한 모습을 간직한 채 옛 성터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역사상의 조선은 기자가 오기 이전의 단군조선, 기자가 망명한 이후의 기자조선, 낙랑군 25개 현 중의 수현인 조선현 등 여러 조선이 존재한다. 그러면 낙사가 『태평환우기』에서 말한 조선성은 과연 어떤 조선성을 가리킨 것일까.
필자는 『태평환우기』에서 말한 조선성은 낙랑군 조선현의 옛 성터를 지칭한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서기 1931년 노룡현 현장 동천화(董天華)가 편찬한 하북성 『노룡현지』(성문출판사)의 평주 조항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이기 때문이다.
"조선현은 『구지(舊志)』에 '성 북쪽 40리에 있었는데 한나라 낙랑군의 속현이다.(朝鮮縣 舊志 在城北四十里 漢樂浪郡之屬縣也)'라고 하였다."
여기서 『구지』는 동천화 이전에 편찬된 옛 『노룡현지』를 가리킨다. 편찬된 시기를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아서 어느 때 누가 편찬한 『노룡현지』인지 알 수 없지만 그 곳에는 하북성 평주 노룡현이 낙랑군 소속 조선현으로 기재되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 점을 상기시키기 위해 『신노룡현지』를 편찬하면서 편자는 그 내용을 인용하여 거기 삽입한 것이다.
오늘날 한반도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한국인에게 중국 하북성 평주는 우리와는 상관없는 다른 나라 이야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사기』 조선열전에 "조선의 장군 왕겹을 봉하여 평주의 제후로 삼았다.(封王唊 爲平州候)"라는 기록이 보이는 것을 보면 하북성 평주는 고조선과 관련이 깊은 지역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하북성 평주 노룡현이 낙랑군 조선현이었다는 옛 『노룡현지』의 기록은 대동강 낙랑설에 세뇌된 한국인들에게 다소 생소하게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낙랑군이 하북성 평주에 있었다는 것은 중국 문헌에서 어렵지 않게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예컨대 『진서(晉書)』 지리지에 "요동, 창려, 현도, 대방, 낙랑 5개 군을 분할하여 평주를 만들었고 뒤에 다시 합쳐서 유주(幽州)가 되었다." "동진 무제 함녕(咸寧) 2년 10월 창려, 요동, 현도, 대방, 낙랑 등 5개 군국을 분할하여 평주를 설치했으며 26개 현을 관할했다"라고 하였다. 『진서』 지리지에 따르면 낙랑군은 창려군 등과 함께 하북성 평주의 관할 하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행정구역의 개편에 따라서 군의 소속현은 수시로 변경되는 것이 상례다. 낙랑군의 현이 이웃한 북평군에 가서 붙기도 하고 요서군에 소속될 수도 있다.
따라서 1931년 노룡현의 현장 동천화가 『노룡현지』를 새로 편찬할 때 하북성 평주 노룡현이 본래는 낙랑군 소속의 조선현이었다고 옛 『노룡현지』를 인용하여 밝힌 것은 결코 오류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다.
이병도는 북한의 대동강 토성리 일대가 낙랑군 조선현이라고 주장하면서 조작이 의심되는 유물 이외에 문헌적 근거는 단 하나도 제시하지 못했지만 하북성 평주에 낙랑군이 있었고 그 관할 하에 조선현이 있었다는 것은 문헌적으로 여러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
더욱이 최근 발견된 『무경총요』의 "북경 북쪽의 조선하", 「두로공신도비문」의 "하북성 노룡현 지역에서의 고조선건국" 등의 문헌 기록은 하북성 평주 노룡현이 고조선의 발상지이고 북경이 고조선의 터전이었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고고학적으로 본 낙랑군 조선현
북경시 대흥구 황촌진(黃村鎭) 삼합장촌(三合庄村)에 있는 고분 유적에서 동한, 북조, 당나라, 요나라 4왕조에 걸친 모두 129좌(座)의 묘지가 발굴됐다.
2010년 북경시에서 토지개발사업을 진행하다가 처음 발견되었고 2014년 북경시 문물연구소에서 본격적으로 발굴작업을 진행하여 세상에 공개되었다.
대흥구 고분 유적지에서는 명문이 새겨진 벽돌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원문은 다음과 같다. "元象二年 四月十七日 樂浪郡朝鮮縣人 韓顯度 銘記"
원상(元象)은 동위(東魏) 효정제(孝靜帝)의 연호로서 원상 2년은 서기 539년이다. 명문은 즉 539년에 낙랑군 조선현 사람 한현도가 사망하여 이곳에 묻힌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대흥구는 현재 북경시 남쪽에 위치해 있는데 위진 시대엔 계현(薊縣)으로서 유주(幽州)에 소속되어 있었다. 한현도는 유주 계현 사람이 아닌 하북성 평주 낙랑군 조선현 사람이므로 묘지명에서 그 원적을 밝힌 것이다.
낙랑군은 서한 무제가 서기전 108년 고조선의 서쪽을 공격하여 설치한 한사군의 하나로서 그 군청소재지 조선현이 지금의 대동강 유역 평양 일대에 위치했다고 인정하는 것이 반도사학의 통설이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 북조 시대 북경지역에서 조성된 고분을 발굴하자 거기서 낙랑군 조선현 사람 한현도의 묘지라고 적힌 명문이 발굴된 것은 우리의 기존 상식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다.
요즘은 민간인도 중국을 자유롭게 왕래하는 일이 가능하지만 한양조선 시기만 해도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파견하는 사신의 신분이 아니면 개인적으로 중국을 가기는 몹시 어려웠다.
그런데 한현도가 1,500년 전에 북경에서 사망하고 또 묘지를 조성하여 그 안에 묘지명까지 묻어 예장을 할 정도였다면 이는 현지 토착민의 무덤이 확실하며 대동강 유역 낙랑군 조선현에 살던 어떤 유맹(流氓)이 북경에 가서 객사하여 조성한 무덤은 결코 아니다.
북경에서 발굴된 한현도 고분의 명문은, 낙랑군 조선현은 대동강 유역이 아닌 하북성 일대에 있었음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하겠다.
중국의 역사학계는 북위 태무제 탁발도(拓跋燾, 408~452)가 북방을 통일할 때 대동강 유역 낙랑군 조선현의 백성들을 하북성 노룡현 일대로 옮겨 조선현을 설치한 것으로 해석하면서, 『위서(魏書)』의 "연화 원년(432) 조선현의 백성들을 비여현으로 옮겨 다시 조선현을 설치했다.(延和元年 徙朝鮮民于肥如 復置)"라는 내용을 그 근거로 내세운다.
그리고 한현도의 가족은 이 이민집단의 후손으로서 북경 주변에 정착하고 살다가 최후에 북경의 대흥구 지역에서 사망하여 장례 지냈을 것이라 추정한다.
그러나 『위서』에 말한 "조선의 백성들을 비여로 옮겨 다시 조선현을 설치했다"는 것은 대동강 유역에 있던 조선의 백성들을 하북성 평주 비여현으로 옮겨왔다는 말이 아니고 하북성 평주 낙랑군에 있던 조선현의 백성들을 평주 비여현으로 이주시켜 조선현을 설치했다는 의미이다.
당시에 비여현은 평주 요서군에 소속되어 있었고 조선현은 평주 낙랑군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낙랑군을 폐지하고 조선현의 백성들을 비여현으로 이주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학계가 『위서』를 인용하여 대동강 유역 조선현의 백성들을 평주 비여현으로의 이주를 주장하는 논리는 아전인수격 해석으로서 전혀 역사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의 반도사학은 이 한심한 중국의 속임수에 속아서 수십년 동안 교치(僑置, 대동강 유역의 조선현을 요서 지역으로 이동하여 이주민을 안치함)설을 주장해 왔다.
낙랑군이 하북성 평주에 있었다는 『진서』의 기록과 평주 노룡현이 낙랑군 조선현이었다는 『노룡현지』의 기록에 따르면 왜 북경시 대흥구 고분 유적지에서 낙랑군 조선현 사람 한현도의 묘지가 발굴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풀린다.
낙랑군 조선현은 북한 대동강면 토성리 일대나 요하 동쪽 해성시, 또는 난하 유역이 아닌 중국 하북성 동남쪽 일대에 있었음이 한현도의 묘지명을 통해서 고고학적으로 증명 된다.
고조선사 연구에서 대동강 중심의 반도사학은 물론 난하 중심의 민족사학도 반성할 점이 있다. 문헌학과 고고학이 고도로 발달한 지금이야말로 반도사학과 민족사학을 넘어 우리의 바른역사를 세울 천재일우의 기회이다.
역사학박사·민족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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