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소설-타인의 시간

잉크의 시간-9나는 지금도 그때의 감격을 잊을 수가 없었다. 상상과는 달리 주위의 풍경이을씨년스럽고 외져 좀 실망했지만, 처음 아버지의 손을 잡고 들어간 우리집은 그대로 알라딘의 램프 속에서 나온 궁전 같았다. 새뜻하게 도배한 눈부신벽, 넓은 응접실과 정갈한 방들, 새로 구입한 자개농과 장식장들, 그리고 나의 아담한 방. 나는 이층에도 올라가보고 방마다 문도 열어보고 나의 침대에도 누워보며 마냥 즐거워했다. 아, 이윽고 밤이 되어 환하게 밝혀지던 그 황홀한 샹들리에의 불빛. 나는 그날 밤 꿈 속에서도 꿈이 아니길 얼마나 뒤척이며 빌었던가.

우리가 이사해 오던 그 무렵에는 이 일대가 허허 벌판이었다. 바다 위에 떠있는 꿈의 섬처럼 간간이 눈에 띄는 집들이 있었을 뿐, 온통 논이고 밭이었다.여름이면 밤이 이울도록 자글자글 개구리가 울었고, 가을이면 누렇게 익은들판에서 메뚜기도 잡을 수 있었다. 집 앞 밭두둑에는 이른 봄부터 늦가을까지 민들레, 제비꽃,씀바귀, 해바라기, 노인장대, 달맞이꽃, 들국화, 코스모스쑥부쟁이들이 자랐고, 우리 가족들이 일군 길섶 자투리땅에는 철따라 상추,부추, 아욱, 들깨, 호박 들이 자랐다.

우리는 매일아침 운동복 차림으로 대문을 나서 그 밭두둑을 거닐기도 하고물뿌리개로 자투리땅의 푸새들에 물을 주고 김을 매 주기도 하며 꿈을 키웠다.게으름뱅이 언니는 늘 아침에 일어나지 못해 아버지께 꾸지람 듣기 일쑤였고, 어머니는 우리들의 등교 시간이 늦어질까봐 아버지를 선두로 줄줄이 대문을 나서는 꽁무니에 대고 재삼 돌아와야 할 시간을 일깨워 주곤 했다. 그때도작은 오빠는 책벌레였다. 아침 산책을 나가면서도 오빠의 손에는 책이 들려있었다. 오빠의 꿈은 장차 하이데거 같은 사상가가 되는 것이었고, 지금도그 꿈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나는 오빠의 꿈이 꼭 이루어지리라 확신한다.아니 꼭 이루어져야 한다. 설령 내 꿈이 이루어지지 않아 영원한 블루스타킹으로 남을지라도.

밭두둑에서 바라본 도시의 아침은 언제나 넉넉하고 포근했다. 푸르게 젖어있는 산과 아침 이내에 에둘려 있는 그림 같은 빌딩들, 그리고 그 아래로 완만하게 흐르는 차량들의 행렬은 그대로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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