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소설-타인의 시간

잉크의 시간-23아, 그 태양. 어느 순간 문득 뒤를 돌아보았을 때 우리의 지친 발걸음을 묶었던 붉은 태양. 마치 굴렁쇠만한 보름달에 진홍의 물감을 들여놓은 듯한 태양이 빌딩과 빌딩 사이, 환상적인 놀을 배경으로 넉넉히 걸려 있는 걸 발견한우리는 숫제 넋을 잃었었다. 만일 그 태양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정말 일을 저질러 버렸을지도 몰랐다.

공중전화부스에서 나온 우리는 그날, 은유의 바람대로 실컷 다리품을 팔았었다. 우리는 다정스레 손을 잡고 끝없이 이어지는 보도를 따라 걸으며 나직나직 노래를 불렀고, 우리의 꿈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고, 아직은 안개 같은 사랑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속살거렸었다. 그러다 우리는 무슨 깨달음처럼 그아름다운 태양을 발견했었다. 아름다운 장면을 보면 눈물이 나오는 걸까. 그태양이 아쉽게도 산 너머로 스르르 미끄러질 때까지, 우리는 젖은 눈망울로몽몽히 지켜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왔던 길을 되짚어 걸었고, 그리고 오래오래 침묵했었다. 집 가까이 이르렀을 때, 은유가 살포시 내 손을 잡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너, 난나(Nanna)에 관해 들어 본 적이 있니? 독일의 물리학자 페히너가 어느 봄날 물데 강가를 산책하고 있을 때 아주 신비한 체험을 했어. 강둑의 꽃속에서 무엇이 나와 옅은 안개 속에서 하늘하늘 춤추고 있는 게 보이더래. 좀더 자세히 관찰해 보니 그 형상이 차츰 선명해지면서 아주 쬐끄만 어린아이의모습으로 나타났어. 그게 난나야. 꽃의 영혼. 일반적으로 난나는 인간의 눈에 잘 띄지 않지만 그날은 태양이 너무 좋아 살짝 꽃 밖으로 나온 거야. 멋지지 않니. 꽃에 영혼이 있다니 말이야. 튜턴족의 신화에도 난나 얘기가 나와.빛의 신 발더가 목욕하고 있는 꽃의 공주 난나의 알몸을 훔쳐보았어. 난나의아름다운 몸매에 반한 발더가 그만 사랑에 빠지게 되었어. 그래서 둘은 결국결혼하게 된단다. 난 오늘 너의 새로운 난나를 보았어. 꽃의 신 폴로라보다도, 숲의 요정 하마드리아스보다도 아름다운....... 우리, 내일 좀더 의젓한난나로 만나. 안녕]

난나, 하고 가만히 중얼거리고 있을 때, 아버지의 굼뜬 기침 사이로 가볍게노크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작은 오빠였다. 얼굴을 겨우 들이밀 수 있을 만큼 밭게 방문을 민 작은오빠가 수줍게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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