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폭동}은 1946년 당시 식량난 등 민생궁핍, 철도와 공장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인한 사회혼란을 노린 좌익의 선전선동이 맞물려 일어났다고 봅니다]지금부터 꼭 48년전 대구사범학교 학생으로 {10.1폭동}에 직접 참여했던 전북한 정무원 외교부 서기관 김계철씨(63.현 중국 길림성장춘시 거주)가 6.25이후 처음으로 지난달 30일 대구를 찾아 당시에 대한 귀중한 증언을 털어놓았다.[아침에 쌀배급 타러 간다며 각 학교 학생들이 줄지어 시청으로 몰려갔습니다. 대구역에 이르니 수만명의 인파가 {적기가}를 부르며 {쌀을 달라} {독재타도}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더군요]
행렬은 무장경찰이 경비중이던 남대구경찰서(사료에 의하면 대구경찰서)에이르렀고 시위대에 밀린 경찰서장은 경찰의 무장해제를 약속했다고 김씨는 회고했다.
총기로 무장한 시위대에 의한 무법천지는 이날 오후 출동한 미군 장갑차가시위대를 밀어낼 때까지 계속됐다고 김씨는 전한다.
김씨는 당시 시위행렬을 따라가며 목격한 시청의 부서진 유리창과 집기들,이미 습격당해 죄수들이 모두 풀려나 텅빈 대구형무소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10.1폭동이 조금 숙진후 김씨는 고향인 안동으로 은신했다는것.
북의 남침후 김씨는 인민군 소위로 입대한다. 인민군 상좌로 진급, 남파간첩교육부대에서 근무한 김씨는 이남출신으로는 어렵게 외교부 서기관까지 올랐다.
한때 종파연루자로 숙청돼 5년간 강제노동도 했던 김씨는 66년 복권돼 사회안전부 동해안북부책임자로 근무중,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67년9월21일 밤12시가 넘어 자동차바퀴로 만든 뗏목에 아내와 아들, 딸 둘을 태우고 다섯시간을 헤엄쳐 밀며 두만강을 건너 망명했습니다]김씨는 {10.1폭동}에 대한 평가가 북한에서는 정세에 따라 수차례 바뀌었다고 밝혔다.
50년말 철도노동자들의 자연발생적인 반미투쟁으로 평가받던 {10.1폭동}이1년뒤에는 남로당이 이끌어냈으나 지도능력부족으로 실패한 투쟁, 그후 박헌영숙청때에는 정세를 잘못 판단한 남로당의 무리한 세력시위사건으로 바뀌었다가 김일성 집권후에는 북한노동당이 직접 지시해 일어난 인민항쟁으로 확정됐다는 것.
현재 중국 길림성 장춘시에서 반김일성운동단체인 {조선민주자유통일투쟁연맹}주석을 맡고 있는 김씨는 국내 월간지에 가명으로 북한상황을 기고하기도했다.
김씨는 이달중순 서울에서 중국 일본 미국 등에서 활동하는 북한탈출망명자대회를 열기로 하고 그 준비에 무척 바쁘다고 말했다.
[대구 대봉동에서 하숙했는데 지금은 어디쯤이냐]고 말문을 열었던 김씨는[열여섯 나이로 역사적 사건을 지켜본 당시 기억이 그대로 되살아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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