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의 판결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있지만 판결전반에 흐르는 근본정신은법치주의의 실현이다. 그러기에 동시대의 생활과 고민을 안고 있는 명판결은그 자체로 법의 반열에까지 오른다.미군정 기간 중인 47년 대법원(재판장 김용무대법관)은 정모씨와 이모씨의가옥명도 청구 상고심 사건에서 "아내의 능력제한을 인정할 수없다"고 판결,관심을 끌었다. 이 사건은 당시 시행되던 의용민법이 '부인이 소송행위등을 할 경우 남편의 허가를 받도록' 규정한데 따라 여자인 원고가 이사건 소송에 있어 남편의 허가를 받았는지 여부가 쟁점이 됐었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처가 소송제기 등에 있어 남편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남편에게 우월적 지배권을 부여한 취지로 남녀평등을 부인하던 구제도의 산물"이라고 전제한 뒤 "우리는 만민평등의 민주주의를 기초로 삼아 국가를 건설할 것이므로 처의 능력제한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이 판결은 해방 이후 남녀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제1보로서 획기적이라는 세간의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헌법이 아직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재판소가법률의 적용을 거부할 수 있느냐를 놓고 찬반양론을 불러왔다."해방이후 민주주의 이념이 우리나라의 새로운 헌법으로 자리하고 있으므로대법원은 이에 어긋나는 법조항을 무효로 선언할 수 있다"는 것이 찬성론자의 이유였다. 그러나 반대론자들은 "장차 국민의 총의 여하에 따라서는 처의능력제한을 그대로 유지할 수도 있으므로 이 문제는 입법기관을 통하여 결정될 문제"라며 대법원판결은 사법권에 의한 입법권의 침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58년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기소된 서울대 문리과대학 유근일학생 사건에 대해 서울지법 형사3부(재판장 유병진판사)는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재판부는"서울대문리대생들의 서클이던 신진회는 정치학도들이 사회민주주의의 이론을 연구하기 위하여 만든 모임으로 경제면에 있어서 특히 민주주의를 강조한것에 불과한만큼 이를 불법 결사라고 볼 수 없으며 교내 신문에 실린 글도그 문구가 다소 과격하기는 하나 국가를 변란케 했다고 볼수없다"고 판결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검찰은 "평화적통일 방법은 북진통일과 유엔 감시하에북한지역에서만의 자유선거 실시에 의한 실지 회복의 두가지뿐"이라며 협상론이나 제헌의회 소집론,유엔감시하의 남북한 선거방안등은 모두 국가보안법에 위배된다고 대항했다. 이 논쟁은 3개월 뒤에 열린 진보당사건 공판에서다시 한번 격렬하게 표출됐다.
명화에도 음란성이 있는가. 69년 초순 유엔화학공업주식회사는 고야가 그린'나체의 마야'를 복사기로 인쇄, 이를 성냥갑속에 넣어 판매하다 부산지법으로부터 벌금을 부과받자 정식재판을 청구,화제를 모았다. 대법원(재판장 김영세대법원판사)은 "명화집에 실려있는 그림이라 하여도 본건과 같이 성냥갑속에 넣어서 판매한 그림은 이를 보는 자에게 성욕을 자극하여 흥분시키는동시에 일반인의 정상적인 성적 정서와 선량한 사회의 풍기를 해칠 가능성이있다"며 명화도 사용여하에 따라 음란성을 인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급속한 공업화로 공해문제가 심각해지던 73년 공해사건에 관한 판결이 나왔다. 울산비료공장에서 배출되는 유해가스로 인근의 과수원이 피해를 입은 사건에 대해 대법원(재판장 김윤행대법원판사)은 "공장가동 초기 유해가스안전시설에 시설상의 하자가 있으며 특히 종업원의 작업기술 미숙으로 많은 양의유해가스를 분출시켜 과수원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사실이 인정된다"며 손해배상을 명령했다. 이 판결은 공해로 인한 불법행위 책임을 인정한 최초의 판결이었으나 책임의 근거로 '시설상의 하자'와 '종업원의 과실'을 들어 전통적인 과실론을 답습했다는 비판을 받기도했다.
곧이어 나온 비슷한 사례의 대법원 판결은 공해사건에 있어서의 과실론을 한걸음 발전시키고있다. 대법원제2부(재판장 한환진대법원판사)는 "공장설립당시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손해를 방지하는 시설을 갖추었다고 하여 공장주가 피해자에게 가한 불법행위에 과실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고 판결,공장측의 주의의무나 위험방지 노력과 관계없이 과실의 존재를 인정했다. 이 두 판결은 그후 계속되는 공해사건 재판의 출발점이 됐다.
아들의 패륜행위를 응징하다 자식을 사망케 한 아버지에게 1,2심 법원이 유죄를 인정했으나 대법원이 이를 파기,아버지의 응징을 정당방위로 인정해준판결도 있었다. 평소에도 부모에게 행패를 부려온 아들이 어느날 만취돼 들어와 저녁식사를 하고있는 아버지에게 '내 술 한잔 먹으라'며 밥상을 차고아버지의 멱살을 잡는등 행패를 부리다 아버지의 주먹에 맞아 넘어져 사망한사건이었다. 대법원제1부(재판장 홍순엽대법원판사)는 74년의 상고심 선고공판에서 "남이 보는 자리에서 인륜상 용납할 수 없는 폭언과 폭행을 가하려는자식을 1차례 때린 행위는 아버지로서의 신분에 대한 부당한 침해를 방지하기 위한 행위이며 정황을 볼때 이는 정당방위에 해당한다"고 판결이유를 밝혔다.
지난81년 여대생 박모양 살해사건과 용산구 윤노파일가 피살사건에 대한 법원의 판결은 '자백은 증거의 왕'이라는 수사관행에 쐐기를 박는 계기를 마련했다. 검찰은 거짓말탐지기등을 동원,박양과 어학연수 동기생이던 정모군으로부터 자백을 받아낸 뒤 살인등 혐의로 기소했다. 그러나 정군은 법정에서공소사실을 모두 부인하면서 검찰에서의 자백은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라고주장했다.
서울지법 동부지원 형사부(재판장 양기준판사)는 "정군의 검찰에서의 자백내용에는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 있고 나머지 증거들도 정군의 범행을 인정하기에는 부족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도 무죄를 확인하면서 "자백의 신빙성 유무를 판단함에 있어서는 첫째 진술내용 자체가 객관적인 합리성을 띠고있는가,둘째 자백의 동기나 이유및 자백에 이르게 된 경위가 어떠한가,셋째 자백 외의 정황증거중 자백과 저촉되거나 모순되는 것은 없는가등을 고려해서 판단해야한다"고 자백의 신빙성에 대한 판단기준까지 제시했다. 이 사건에서는 또 거짓말 탐지기의 형사소송법상 증거능력을 부인하기도 했다.쟁의행위 기간중 임금의 지급여부는 전국의 사업장에서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되고있다. 이에 대해서 대법원은 지난92년3월 임금을 교환적 부분과 생활보장적부분으로 나누어 '무노동 무임금'원칙을 적용하도록 판시했다.쟁의행위로 인하여 사용자에게 근로를 제공하지 아니한 근로자는 근로의 대가인 임금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은 임금중 사실상 근로를 제공한데 대하여 받는 교환적 부분과 근로자의 지위에 기하여 받는 생활보장적 부분중 전자만에국한되며 이는 또 단체협약이나 취업규칙에 결근,지각,조퇴시 임금의 감액을결정하고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밝힌 것이다. 이판결은 쟁의기간 중에도 임금의 일부를 지급해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함으로써 이를 근로자의 권리로 승격시켰다는 데 의의가 컸다. 〈서영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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