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현충일의미 퇴색 마음 아파"

"평생을 말 한마디 못한채 병상에서 누워지내다 숨진 동료도 있는데 이만하면 더 이상 뭘 바라겠습니까"6일은 제40회 현충일. 해마다 돌아오는 이날이지만 강명룡씨(65· 1급상이용사)를 비롯 대구보훈병원에서 45년전 상흔을 가누며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1백40명 6·25참전 용사에게 는 해가 갈수록 현충일 의미가 퇴색되는 세태에자부심보다는 고통이 더해온다.

중학교를 갓 졸업해 17세 나던해인 1949년에 입대, 6·25 발발 당시 7사단 3연대 5중대 1소대 병장으로 근무하던 강씨는 50년 8월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북한군을 맞아 싸우다 경북 월성군 포항부근 낙산다리(당시) 전투에서 대퇴부에총알을 맞고 쓰러졌다.중대원 절반이 숨지는 치열한 전투였다. 강씨도 대구의 육군병원에서 두달간 치료를 받았다.

성치 않은 몸으로 다시 5사단 6연대 6중대 중대본부 선임하사로 배속받은 강씨는 전투가 교착상태에 빠진 51년 9월 강원도 양구군 924고지(일명 김일성고지)전투에서 정수리부분에 적군의 총탄이 스쳐 두개골이 부숴지는 중상을 입고,또한번 기약없는 투병생활에 들어가야 했다. 1년간을 마산과 부산의 육군병원을 오가며 투병생활을했다. 병상에서 전세(전세)를 들으며 일희일비할때는고통도 잊어버리고 전투에 참가하지 못하는 것이 원통할 뿐이었다.수차례의 수술과 경북전상자요양원 대구보훈병원에서 40년 이상 투병생활을하고있지만 아직도 말이 어눌하고 한쪽팔과 두다리를 못써 휠체어 신세를 지고있다.

강씨의 삶은 전후 우리시대의 아픔이자 역경을 이겨내는 한국민의 상징으로보였다.

중상을 입은 처지여서부인 박옥매씨(55)는 간병하느라 강씨곁을 떠날수 없어 연금으로만 자녀학업과 생계를 꾸려 생활고는 이루 말할수 없었다.박씨는 "다행히 애들이 잘 참아줬다"며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구김없이 장성한 애들이 더없이 고마울 뿐"이라고 말할땐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우리가 무슨 대가를 바라고 싸운 것이 아니지만 휴전이 된지 반세기가 다돼가는데도 아물지 않는 고통이 조국의 화려한 번영뒤에 점점 잊혀져가는 것 같아 안타까울뿐"이라고 덧붙였다.

〈이춘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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