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는 증언한다 광복50주년특집 전일본군 위안부 수기(1)-이용수

(1) 연행나는 일제치하인 1928년 12월 13일, 당시 지명으로 대구의 니시키마치 니쵸우메 103번지, 지금의 북구 고성동 시민운동장근처에서 태어났다.가족은 할머니와 부모님, 오빠한명, 남동생 넷이 있었으며 나는 6남매중둘째이자 고명딸이었다.

너나할것 없이 가난했던 그시절, 우리집도 찢어지게 가난했다. 밥대신 참비름이나 소비름, 소굴챙이 따위를 삶아 무쳐먹거나 죽을 끓여 먹기도 했다.아버지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솜공장과 미창(미창) 등에서 일하셨고 어머니는내가 열한두살때 쌍둥이동생들을나와 할머니에게 맡기고 수창보통학교앞의부자 친척집에 유모로 가 계셨다.우리집은 엄마덕분에 논 2마지기정도를 소작할 수 있었다.

나는 달성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집안이 어려워 채 1년도 못다녔고 아홉살때인가부터 아버지가 일하시는 솜공장에 나갔다. 집근처 야학에 다니면서 일본말도 배웠다.

열다섯살때이던가, 동네에 있는 칠성보통학교에서 가끔씩 정신대(정신대)훈련이라는걸 받았다. 운동장에서 남녀가따로 줄을 서서 체조도 하고 똑바로 열을 지어 행진하기도 했다. 여자들은 대개 열대여섯살 정도였으며 군인모자같은걸 쓰고 몸뻬차림으로 훈련을 받았다.

1943년인가보다. 내가 열다섯살나던 해, 9월무렵이었던 것 같다.김분순이라는 동갑 친구가 있었는데 어느날 그애 집에 놀러갔다. 술장사를하는 그애 어머니가 가난이 줄줄 흐르는 내모습이 딱했던지 "야야, 니 그라지 말고 분순이하고 둘이 어디 부잣집에 남의집살이라도(식모) 가거라"고 했다. 그 말에 나는 누가 붙잡아가기라도하듯 "어언제~ 엄마하고 떨어져선 안간다"하고는 집으로 뛰어와 버렸다.

며칠후 분순이가 나물캐러 가자며 왔길래 둘이서 무태로 갔다. 한웅큼 나물을 뜯어강가모래에 묻어놓고 다슬기를 잡으며 놀았다.

어느덧 해가 서산에 뉘엿한데 강둑에 두 남자가 서있었다. 한사람은 흰옷을, 다른한사람은 당꼬바지차림에 허리에 뭔가를 차고 있었다. 당꼬바지 남자가 우리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더럭 겁이 난 나는 분순일랑 아랑곳없이냅다 뛰어 집으로 돌아왔다.

한 스무날 지났을까, 이른 새벽인데 봉창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분순이였다. 얼결에 밖으로 나가보니 골목끝에 군복차림의 일본남자 1명이 있고 굴다리밑에 또다른 남자 1명과 조선여자 3명이 있었다. 나는 뭐가 뭔지도 모른채낯선 사람들앞에 낡아빠진 나무게다를 신고 있는 것만이 부끄러워 집에 돌아가 고무신으로 바꿔신고 오겠다고 했다. 그러자 군복차림의 남자가 "그냥 가자"며 윽박질렀다. 그것이 정신대로 끌려가는 길인줄 그때는 까맣게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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