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복50년 해외기획취재 시리즈-환국

일본의 항복소식을 서안 광복군 진영에서는 8월10일 알았고, 연안 공산지역 우리민족에게 알려진것은 11일 오후5시쯤이었다. 당시 상황에서 일본이항복했다는 소리를 들었다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당연히 즐거워했을 것이다.그러나 백범 김구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백범일지는 그 심정을 이렇게 썼다. "아!왜적의 항복, 이것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 우리가 이번 전쟁에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 국제간에 발언권이 박약하리라". 일본의 패망과 우리의 광복은 좋은 일이나, 우리 특공대조차 투입해보지 못하고이렇게 됐으니 장차 국가 건설에 큰 장애를 받을 것이라고 보다 멀리 생각한결과였다.공산지역에서 우리 민족을 지도하고 있던 김두봉도 비슷한 반응을보였다고 심지연교수(경남대)는 전하고 있다. "동무들, 기쁜 소식을 들었음에도 우리는 온몸 온정신으로 맞이하지 못하는 마음이 한편에 있습니다" 이것이 그의 즉석 연설이었다. 이 소식이 있은 후 광복군은 가능한 빨리 우리손으로 조국을 넘겨 받아야 한다는 판단을 하게 됐다. 그런 생각에서 발로된것이 곧 이은 '국내 진입 작전'이었다. 광복군이 미군의 협조로 시도한 이작전은 미군 비행기 편으로 우리대원 4명을 국내로 투입, 일본군으로부터 조국을 넘겨 받자는 것이었다.

8월18일 시도된 이 작전에는 미군 18명도 함께 했다. 이들은 새벽5시20분서안 비행장을 출발해 낮12시쯤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했다. 대원이었던장준하-김준엽 등의 글은 이때의 소회를 아주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그러나 여기 주둔하던 일본군은 '아직 군 본부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다'는 이유로 이들을 거부, 요원들은 19일 중국으로 되돌아와야 했었다.이런 가운데 임시정부측은 세가지 분야로 나눠귀국을 준비하고 있었다.하나는 임정의 귀국이었고, 또 하나는 광복군의 귀국, 나머지 하나는 동포들의 귀국이었다.

그중 임시정부의 귀국은 미국측으로부터 정부 단위로서는 안된다고 거부됐다. 이것은 미국의 시종 일관된 입장이었다. 임정을 인정했다가 다른 독립운동 단체들이 나중에 반발할 경우 어떤 책임을 지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미국은 프랑스의 망명정부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을 취했었다.

이로인해 임정 인사들은 개인 신분으로 귀국했다. 조국에 도착하고서도 장갑차에 태워 경교장(현재의 서울 고려병원 자리)과 한 한미호텔 등으로 국민들 모르게 모셔다 놓고야 이 사실을 발표하던 미국이었다. 그러면서도 미군측은 수송기를 대 주는 등 편의를 제공했다.

김구주석 등 귀국 1진이 중국을 떠난 것은 광복된 뒤 1백일 가깝던 11월23일이었다. 백범은 독수리작전 요원들을 격려하러 서안에 갔다가 일본 패망소식을 들은 후 중경으로 귀환, 장개석-송경령 부부 등 중국 국민당 요인들과 주은래 등 중국공산당 요인들로부터 각각 성대한 본국 환송연을 받았다.이어 화상산 공동묘지에 있는 어머니와 아들의 묘소를 참배, 이별의 인사를했다.

그런 다음 백범등은 11월15일 상해로 이동, 홍구공원에서 그를 환영하러운집한 6천명 동포들에게 인사를 했었다. 13년만의 상해 귀환이었다. 그리고그가 올라섰던 연단은 바로 13년전 그가 파견한 윤봉길의사가 일본 요인들을처단한 바로 그 자리였다.

그런뒤 그는 만국공묘에 있는 아내의 무덤을 찾았다. 어머니-아내-아들을광복에 바쳐 모두 중국 산하에 묻고 이제 고국으로 되돌아 가려 하는 것이다.

이럴때 임정은 정부 대표로 남경에 일종의 영사관인 '주화(주화)대표부'를구성해 놨다. 단장은 박찬익, 부단장 민필호, 보좌역 민영구 등이었다. 이들은 귀국을 않고 남아 동포들의 귀국 등 뒤처리를 할 참이었다.광복군도 재빨리 활동을 시작했다. 일본군에서 풀려 나온 우리 청년들을빨리 광복군으로 편입시켜 귀국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거의 10만명이나 돼 편입 작업이 쉬운 것이 아니었다. 이를 위해 이청천 사령관 등 광복군 간부들은 귀국을 않고 뛰어 다녔다.

이미 일본군 출신들은 장형순(나중에 국회부의장), 민충식(호주대사 역임)등 장교출신의 지휘 아래 모여 상해에 6천명, 항주에 2천명 등이 집단 생활을 하고 있었다.

광복군 사령관 지청천장군은 이들의 사열을 받고 광복군으로 편입시켰다.그러나 임정이 정부로서 인정받지 못하는데 광복군이 한국군으로 인정받을리는 만무한 것이었다. 역시 개인자격 귀국이었다. 전 고려대 총장 김준엽선생은 그의 '장정'에서 이때 광복군이 10만 대군의 전열을 그대로 유지해 귀국했더라면 여순사건은 물론 6.25와 남북분단까지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안타까워 했다.

연안에 있던 공산계열의 조선의용군도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 광복 무렵 2천여명에 달했던 이들은 조국 해방을 자기들 손으로 하겠다는 일념 아래 한국 국경까지의 4천7백리를 걸어서 행군했다. 9월3일 연안을 떠나던 날, 모택동은 이들의 장도를 격려하는 환송회를 열었다.

의용군에도 일본군 소속 우리 청년들이 계속 편입돼 11월에는 그 숫자가 8만명에 다다랐다. 그러나 40여일을 걸어서 도착한 중국 심양에서 소련군의제지를 받았다. 귀국이 안된다는것이었다. 그 많은 무장 군대를 그대로 입국시켰다가는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가 어려워질 공산이 컸기 때문이었을터였다.

그러던 틈바구니에서 1천5백여명을 선발대로 뽑아 신의주까지 들어갔으나,이들은 끝내 무장해제 당하고, 다시 만주로 되돌아 왔다. 그 뒤 중국에서는다시 국공 내전이 불붙어 이들은 이제 중국 공산당을 위해 싸우는 군대가 되지 않을 수 없게 돼 버린 것이다.

본토 지역 교포들을 돌보기 위해 남경에 만들어졌던 주화대표부는 48년도까지 활동을 계속했다. 그 건물은 아직도 새집 같이 남아 있었다. 남경시 백하구(백하구) 삼조항(삼조항) 복성신촌(복성신촌)8호 이층집이 그것이었다.대지가 2백50여평 되는 골목 안 가옥으로, 중국으로 보면 상류계층이 살만한집이었다. 38세 가량의 이 집 현재주인 양장연씨는 무슨 회사 경리담당 매니저라고 했으며, 승용차도 보유하고 있었다.

76세라는 그의 어머니마씨 할머니는 자기들이 54년도에 이집으로 이사왔다고 했다. 한중 수교 이후 한국유학생 등의 방문이 잦아졌다면서, 그들로부터 들었다며 김구선생 얘기도 알고 있었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