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는 증언한다 전일본군 위안부 수기(14)

아유타야의 병원에서 넉달쯤 일본군 부상병 간호를 하며 지내던 어느날 일본군인들이 유난히 쑥덕거려댔다. 그 이튿날 중국 남경방송을 통해 조선이해방이됐다는 소식을 들었다.우리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기뻐 날뛰었다. 일본군들이 "너희들은 얼마나 좋겠느냐. 우리 일본은 망했다"고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마침내 아유타야에서의 생활을 끝낸 우리는 태국의 한 수용소로 옮겨졌다. 거기엔 조선인징병군인, 군속, 장사꾼 등으로 바글바글했다.

3년여 버마에서 겪었던 온갖 일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지나갔다. 만다레에서 아키아부로 옮겨가던 도중에서 일어났던 일은 특히 가슴아팠다. 어느섬에 잠시 머물때였는데 한 언니가 폐병이 악화돼 곧 죽게 됐다. 다른 조원들이 아키아부로 떠나면서 내가 남아 그 언니를 돌보았다. 열흘쯤 지나 언니는 결국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한많은 생을 하직하고 말았다. 군인들이 시체수습을 꺼리길래 내가 직접 화장시켜 바다에 띄워보냈다.

수용소에 얼마간 머문후 우리는 귀향배를 탔다. 드디어 인천항. 그러나 조선천지에 호열자가 들끓고 있다는 소문속에 인천 앞바다에서 보름정도 떠있어야 했다. 마침내 우리는 온몸을 소독한후 배에서 내렸다. 그때 누군가가우리에게 1천원씩을 주었다.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어디 갔다왔느냐고 캐물으셨지만 "자꾸 물으면 죽어버리겠다"고 신경질을 부렸다. 하루는 외숙모가 집에 와서 "양반집에 너같은 더러운 애가 있을 수 없다"며 야단쳤다. 나는 일가친척들로부터 인간대접을 못받았다. 서러워서 울기도 많이 했지만 내팔자이거니 체념하며 살아왔다.

한때는 먹고살기 위해 기생이 된 적도 있었고, 상처한 남자와 가정을 꾸린적도 있었지만 훗날 그는 자살을 해버려 짧은 행복으로 끝나고 말았다. 지금까지도 나는 온 몸이 어디랄것 없이 아프다. 오랫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고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남들처럼 평범한 행복을 누릴 수도 있었을 내인생이 어쩌면 이리 외롭게 돼버렸는지 억울하고 분한 마음 가눌길 없지만 어쩌랴, 시대를 잘못 타고난 내 운명인 것을. 다만 이제는 일본이 자기잘못을 인정하고솔직하게 사죄하는 모습을 죽기전에 보고싶을 뿐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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