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공립협회 창립**미국 이민들은 제대로 안착하기도 전인 1903년에 벌써 조직체를 만들기시작했다. 하와이라면 이제 막 배에서 내려 이민 짐을 챙길 즈음이었고, 본토에서는 아직동포조차 몇 없던 때였다. 이 조직체들이 어떤 의식을 가졌던가는 1904년쯤부터 벌어지는 일본영사 관할 거부운동에서 선명해진다.1904년말쯤 하와이 이민들은 조국 정부에 자신들을 보호해 줄 영사를 파견해 달라고 청원한다. 그러나 조국의 대답은 그야말로 무능, 무책임했다. 돈이 없어 못 보내고 일본 영사를 대리영사로 임명하니 거기 가서 기대라는것이다.
그러나 동포들은 다시청원서를 보내고 정부를 꾸짖는다. "하늘에는 해가두개 있을 수 없고 백성에게 두 왕이 있을 수 없다했거늘…". 그러면서 "돈이 없어 못보낸다면 경비는 우리들이 부담할 터이니 사람만 파견해 달라"고까지 한다.
비슷한 사건은 1906년에도 일어났다. 4월18일 샌프란시스코 전체가 파괴되는 대지진이 발생했다. 본국 정부는 구휼금을 보내 동포들을 돕도록 했다.문제는 이 돈을 일본영사를 통해 나눠 주기로 한 것이었다. 6개월 전 외교권을 뺏긴 즈음이었다.
이곳에 있던 한민족 조직체는 즉각 국내 신문에 성명서를 보냈다. "우리는굶어서 죽을지언정 일본 영사의 간섭은 받지 않을 것이다" 뒤늦게 사태를 안고종황제는 1천9백 달러를 미국인 선교사 편으로 전달했다. 대한매일신보 모금 4천환도 마찬가지였다.
그 다음해에는 뉴욕 조직체에서 일본 영사의 간계를 파악, 미국 전체 교포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그가 우리 교포를 관할하려 인구조사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일들에서도 드러나는 것은 조직화의 밑바탕이 애국심이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출발한 조직체들이 보다 정비된 모습을보이는 것은 1905년이다.본토 '공립협회' 및 하와이'에바친목회'등이 대표적인 것이었다.본토의 공립협회는 도산 안창호선생 주도로 1905년4월 샌프란시스코에서결성됐다. 처음 회원은 LA와 샌프란시스코의 49명. 그러나 곧 캘리포니아 전역의 동포들이 참여해 2년만에 회원이 6백54명에 이르렀다. 다음해에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까지 지회가 설립됐다. 세계 한민족의 대변기관이 되기를 지향했던 것이다. 이 포부는 창립4년만에 스스로 '대한인국민회'의모체가 됨으로써 성취된다.
그 원대한 꿈 때문에 공립협회는 창립 반년뒤인 11월14일 회관도 마련했다. 모두 생활이 어렵지만 바야흐로 일본에 대항해 싸울 주체가 돼야 할시점을 맞은 것이었다. 그 3일 뒤 을사조약이 늑결돼 군대가 없어지고 외교권도 잃는 참이었다. 외교권을 잃는다는 것은 특히 해외교포들에겐 국제 미아가 된다는 얘기였다.
일이 이렇게 빨리 악화되자 공립협회는 즉각 신문을 창간했다. 신문은 단결과 응전의 더 없는 도구이기 때문이었다. 창간일은 을사조약 3일 뒤. 부수가 4천여부에 달했고, 한국 내에도 보급소가 41개에 달했다. 러시아에도 애독자가 파다했다.
당시 27세이던 도산선생은 그 3년전에 유학하겠다고 미국에 건너와 있었다. 대동강가에서 태어나 17세 때 서울 갔다가 여비가 떨어졌던 것이 미국인연의 출발이었다. 공짜로 먹여주기까지 한다는 광고에 언더우드 목사의구세학당에 들어간 것이었다. 그길로 독립협회 활동에까지 끼었던 도산은 곧이 협회가 깨어지는 것을 보고 교육학을 공부해 교육자가 될 포부로 1902년미국에 건너왔다.
도산은 처음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LA에서 1백14㎞ 떨어진 리버사이드에서농장일을 했다. 그러나 이곳 교포들의 생활을 보고는 공부를 포기했다. 그보다는 이들의 일자리를 주선하고 단결시키며,야학에서 가르치는 일이 더 급하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도산이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옮긴 것은 30여 동지들의 뜻 때문이었다. 당시 더 중심되던 그곳으로 가 더 큰일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 결과가 공립협회였다. 그는여기서 이 협회를 세운 2년 후 이번에는 국내로 들어간다.보다 큰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의 결과는 10년대 우리 광복운동의 모태가 되는 신민회 결성이었다.
본토에는 공립협회와 같은 해대동보국회도 창립됐다.LA근교 파사디나(Pasadena)에 자리 잡았다.회원은 5백여명. 나중에 스티븐스를 처단한 장인환의사도 회원이었다.
하와이에서는 지역별로 여러 단체가 생겨났다. 제2의 와이키키로 기대를모으면서 지금 한창 개발이 진행중인 '에바'지역 거주자들이 먼저 만든 것이 에바친목회였고, 인접한 와이파후에서도 공동회가 섰다. 특히 을사조약및 헤이그밀사 사건-고종 강제퇴위 등 사건 뒤에는 애국 단체들이 24개나줄을 이어 나타났다.
이렇게 주요 거점 조직체들이 정비된지 2년 지난 1907년에는 미국 서부의맨 꼭대기 시애틀(워싱턴주)과 동부의 뉴욕에서도 조직체가 등장한다. 한민족이 이만큼 넓게 발뻗기 시작한 것이었다. 신흥동맹회와 뉴욕공제회가 그것이었다.
이들 조직체들은 불과 몇년 뒤 대한인국민회로대동단결한다. 그 모체가바로 공립협회였다. 그점에서 공립협회의첫 회관은 참으로 의의 있는 유적이다. 미국 본토 우리 광복운동의 요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 퍼시픽가(PacificStreet) 938호 옛 건물은 남아있지 않다. 회관 설립 다음해의 대지진 때 소실돼 버렸기 때문이다.취재팀이 찾아가 본 그곳은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 안이었다. 현재 인구 70만의 이 도시에 중국인이 10만명이나 살고 있다는 얘기에서도 짐작되듯이, 이곳 차이나타운은 미국 어느 도시것 보다 컸다. 초기 우리 이민들이곁들여 살았던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백인들의 기피가 워낙 심해 다른 곳에서는 살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차이나타운은 초기 우리 이민들에게 둥지가 돼 준 셈이었다.
이 차이나타운은 놉 힐이라는 산꼭대기 마을에서 샌프란시스코만(만)의바다로 내려오는 비탈 일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미국 답잖게 산봉우리가 많은 지역에 형성돼 있는 이 도시에서는 그 꼭대기를 힐이라 불렀다. 경사가심해 힐로 오르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곳에는 밧줄로 끌어올리는 버스(케이블카)가 특색이었다.
놉힐의 꼭대기는 나중 얘기할 스티븐스 처단 사건과 관련된 페어먼트 호텔이 있는 곳이다. 우리 초기 이민들은 바로 그곳에서부터 시작해 비탈을 내려오면서 몇 블록에 흩어져 이발소, 세탁소, 식당, 당구장 등을 하며 살았다고 했다. 그 얼마 안떨어진 곳에 김도라할머니의 집이 있었고 바로 한 블록 밑에 공립회관이 있었다. 가까이엔 뒷날 유서깊은 우리 교회가 들어서기도 했다. 바다쪽 끝에는스티븐스를 처단한 현장인 샌프란시스코 항구 부두빌딩이 있기도 하다.
공립회관이 있었던 퍼시픽가는 힐 꼭대기에서 내려오는 왕복 2차선 도로였다. 또 옛 터 938호에는 지금 버젓한 3층 주택이 들어서 있었다. 김할머니는그 바로 맞은편 939호에서 늦게까지 문양목선생이 세탁소를 했다고 회억했다. 스티븐스 사건과도관련된 선생은 그런 식으로 끝까지 광복운동의 첫요람을 지켜보며 살았던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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