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주남산-베일에 싸인 천년왕릉의 비밀

남산 기슭 명당자리마다 천년의 비밀을 고이 간직한 채 잠들어있는 왕릉. 화려한 즉위와 애달픈승하, 그리고 땅에 묻힌지 천수백년….

이제 천상의 세계에서 곱디 고운 왕후를 다시 만나 해후의 기쁨을 나누고 계신걸까, 허망한 신라천년의 흥망성쇠를 되짚고 계신걸까? 빽빽한 노송에 둘러싸인 왕릉은 세월의 넋두리를 아는지 모르는지 풀섶의 울음소리에도 침묵으로 화답한다.남산의 왕릉은 대개가 표면에 아무런 장식이 없는 원형봉토분으로 꾸며 여인의 젖가슴을 너무나도 닮았다. 동쪽 기슭의 헌강왕릉과 정강왕릉만이 원형봉토분 밑둘레에 길게 다듬어 만든 장대석을 쌓아 올렸을뿐이다. 또 왕릉주변에는 울창한소나무들과 산죽이 둘러싸여 여낙낙한 풍경을 연출한다. 특히 신라의 마지막 왕 경애왕릉은 병풍처럼 둘러처진 소나무 정경이 가슴에 저미쳐는 아픔으로 다가온다. 능 주위 등 굽은 노송 가지들이 동서남북을 가릴 것 없이 모두 왕릉을 향해 뻗어 신라의 멸망을 애도하는 듯하다.남산 기슭 곳곳에 자리잡은 왕릉은 모두 12기, 박혁거세 왕후인 알영왕비 능까지 포함하면 13기에 이른다. 이들 왕릉에는 승하한 왕의 이름이 일일이 명시되어있다. 그러나 이들 왕릉에 대해 학계에서 끊임없이 제기되고있는 수수께끼를 접하다보면 혼돈은 더해진다. 특히 삼릉과 경애왕릉에대한 진위여부를 놓고 벌어진 논란은 학계와 관련 문중(門中)에 큰 파장을 일으키곤 했지만 결론없이 심연의 미궁속으로 빠지곤했다.

학계에서 신라왕릉의 진위여부를 공표하는 것은 일종의 금기사항으로 통하고있다. 해마다 제사를드리는 조상무덤을 놓고 가짜라고한다면 가만있을 문중들이 없기때문이다. 그래서 때론 은밀한논문발표로 끝을 맺곤 한다. 이렇듯 왕릉에 대한 조사와 발표에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른다. 불국사 인근의 괘릉이 조선조에 문무왕릉으로 잘못 소개된 것을 고치는데만도 20여년이 걸렸다. 위당정인보가 제기한 문제가 20여년후인 73년에야 정정될 수 있었다. 60년대 일어난 김유신장군묘의진위여부 논란때도 학계는 관련문중들로 부터 혹독한 고통을 치러야만했다.

신라왕릉에 대한 이의제기는 지금으로부터 2백60여년전인 17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8세기중엽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한 선비 화계(花溪) 유의건(柳宜健)은 유명한 나릉진안설(羅陵眞안說)을 통해 왕릉의 의문을 용기있게 파헤쳐간다. 화계는 영조6년인 1730년 11기에불과했던 신라왕릉이 갑자기 28개로 늘어난 사실을 주목하고있다. 새로 불어난 17기의 능에 대해화계의 신나릉진안설을 처음 소개한 일본인 오사카 로쿠마치 (大坂六村)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있다. "1730년 경주 지방의 세력이었던 박씨의 자손들은 김씨와 달콤하게 타협하여 일찍이 잃어버렸던 박씨의 여섯 왕 분(分)을 사정이 좋은 내남면(서남산 일대)에 얽었다. 세력이 없었던 석씨는 1기도 구할 수 없었다…"즉 이말은 1730년 새로이 지정된 17기 왕릉중 박씨가 6기, 김씨가11기를 차지하고 세력이 없던 석씨들은 1기도 차지하지 못한 것(신라 56대왕중 박씨가 10왕, 석씨가 8왕, 김씨가 38왕에 이른다)은 물론 지방관권이 왕릉지정을 임의로 한 것이라 오사카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또 새로 늘어난 왕릉의 연유에 대해서도 문자기록에 의하지 아니하고 '무식한촌한(村漢)' 의 말만 듣고 결정했다고 기록하고있다.

한편 현재 학계 일부에서도 동남산의 왕릉(49대 헌강왕릉 50대 정강왕릉)은 경주김씨문중 소관이고 서남산(일성·지마·아달라·신덕·경명왕·경애왕릉)과 오릉은 박씨문중으로 갈리는 등 천년에 걸친 왕의 무덤이 동쪽과 서쪽으로 확연히 구분된 점에 대해 인위적인 개입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8대 아달라왕과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의 능이 나란히 있는삼릉의 경우 지리적 근접성등으로 가까운 혈연관계일 가능성이 높으나 8대 아달라왕의 능이 7백년의 먼후손인 신덕·경명왕릉과 함께 장기간 공백을 넘어 같이 존재하기 힘들다는 견해가 설득력을 주고 있다. 게다가 삼릉중 53대 신덕왕릉(912~917)의 내부구조는 통일(675년) 전후기양식인천장이 높은 횡혈식 석실분으로 시대차가 2백40여년이나 나고 있다. 삼릉 두번째 무덤인 경명왕릉은 왕시신을 화장하여 뼈를 뿌렸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어 능이 없는데도 능을 지정, 의혹을더해주고 있다.

이밖에 경애왕릉 위치 역시 삼국사기에는 남산 해목령(蟹目領)으로 기록돼 있는 점을 비교해볼때현재 위치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일부학자들은 남산 윤을곡과 포석계곡의 경계령에 있는 현재의 일성왕릉자리를 경애왕릉의 원 위치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사적지정은 수정되지 않고있고 학계 역시 왕릉명칭의 허구성을 파헤치는 논의가 내부선에만그치는 한계를 드러내고있다. 그래서 남산왕릉에 대한 수수께끼는 무단한 상념의 자맥질로 의문의 깊이가 더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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