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황장엽망명-북한 태도 왜 바꿨나

중국을 둘러싸고 남북한의 전면적 외교전양상으로 치달았던 '황장엽 노동당비서 망명사건'이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 조짐을 보이고 있다.

17일 일본조총련계 통신인 조선통신 보도에 따르면, 북한외교부대변인은 황비서망명사건과 관련해 평양소재 조선중앙통신기자의 질문에 답변하면서"그가 망명을 추구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변절을 의미하는 것으로 변절자는 어디든 가라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라고 밝혀 황비서의 망명요청이사실로 확인될 경우 수용할 가능성을 시사했기때문이다.

이같은 북한의 반응은 그동안 보여왔던 극렬한 강경태도와는 달리, 이번 사건에 대한 성격 규정을 새로이 시도하려는 것으로 풀이될 수 있다는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당초 북한은 한국정부가 황비서의 망명요청 사실을 공식 발표했던 12일 '한국측의 납치' 운운하며 '응당한 조치'를 취할 것임을 강조해왔다.

이에 따라 북한은 황비서가 체류중인 북경주재 한국대사관 영사부 건물 부근에'특공대'를 대거투입, 위력시위를 벌이는가 하면 북경에 고위 대표단을 파견, 황비서의 한국행을 저지하기 위해총력을 기울여 왔다.

이같은 북한의 결사저지 태도는 당연히 주재국인 중국측이 운신할 폭을 극도로 좁혀왔다. 전통적사회주의 혈맹인 북한의 존재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중국측은 이후 한국과의 교섭에서 '좀더 조사를 해보자'며 신중한 자세를 보였던 것.

중국의 시간끌기는 당연히 망명협상의 장기화로 연결될 것으로 예상돼 정부는 장기화에 대비한다각적인 대책마련에 부심해온게 사실이다.

그러나 북한이 '변절자'라는 개념을 동원, 황비서의 '부도덕성'을 부각시키면서 뭔가 변화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움직임이라는게 정부 당국자들의 지적이다.

즉, 이번 사건을 자신들의 체제위기와 관련된 사건이 아닌 개인적인 '변절'에서 비롯된 일로 몰고가겠다는 의도를 나타낸 것이라는 분석이다.

통일원 당국자는 "북한이 황비서의 망명을 인정하고 들어가는 것 같다"며 "중국정부와 벌여온 외교교섭에서 뭔가 한계를 느낀 것 같다"고 말해 북한의 변화움직임을 중시했다.이 당국자는 또 "북한이 더이상 매달려봤자 이득이 안된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현실적인 판단을 한 게 아닌가 분석된다"며 "만약 북한이 계속 지금과 같은 강수를 둔다면미국 일본 및 중국에 더이상 접근하기가 어려운, 위기상황으로 함몰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 당국자는 북한이 올해 김일성 사망 3주기를 마친뒤 김정일의 권력승계를 추진할 것이라고 내다보면서 이같은 대사를 앞두고 나름대로의 전략이 있어 어쩔 수 없이 현실을 수용했을 것이라고분석했다.

외무부측은 북한이 보여주고 있는 자세가 지난 67년 3월에 발생했던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의미국망명 사건과 유사한 점에 유의하고 있다.

미·소 냉전대결이 첨예했던 당시, 비동맹권인 인도를 극비리에 여행중이던 스베틀라나는 모스크바로 돌아오기 직전 뉴델리주재 미대사관에 나타나 자신이 스탈린의 딸임을 알리고 망명을 신청했었다.

동서 냉전의 양거두격인 미국과 소련은 즉각 외교전쟁에 돌입했다. 소련은 처음에는 '미 중앙정보국(CIA)에서 납치했다'고 강력히 주장하며 반발 했었다.

그러나 곧이어 스베틀라나가 자의에 의한 망명임을 명백히 밝히고 나서자 소련은 그녀를 CIA로부터 돈을 받고 조국을 배신한 여자로 매도해버렸고 이로 인해 사태수습의 단초가 마련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명백한 자유의사를 확인한 이상 더이상 사건에 매달리기 보다는 조속한 사태수습의 길을 선택했던 것.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몰고가기 보다는'변절자'의 '한심한 행위'로 치부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소련의 판단 덕분에 조기수습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외무부의 다른 당국자는 "북한의 이번 움직임이 일견 중대한 의미가 있는것 같지만 아직은 속단하기 이르다"며 매우 신중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그는 "과거 유사한 외교분쟁을 수습하는과정에서 북한측이 어떤 수순을 밟아 사태를 풀어나갔는지를 면밀하게 분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북한이 시사하고 있는 태도 변화의 조짐이 과연 황비서 사건을 수습하는 단초가 될 것인지, 그리고 이같은 변화를 정부가 어떻게 활용, 실질적인 결실을 거두어 낼지 향후 사태 전개방향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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