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금융 100년(7)-1960년대까지 ②

50년대 6·25전쟁 여파로 한때 14.9%%까지 올라갔던 경북지역 금융의 전국점유비중은 60년대들어 곤두박질친다.

특히 62년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따른 공업화정책이 수도권과 부산권, 그리고 울산, 마산,여수등 임해지역 위주로 추진됨에 따라 경북금융의 상대적 낙후는 가속화됐다. 오늘날 지역경제의 기형적 구조와 침체는 이때 이미 예고됐다.

경북경제는 60년대 고도성장에 발맞추어 장족의 발전을 이룩했다. 61년부터 70년까지 10년간 도내 총생산은 연평균 8.4%%라는 고성장을 기록하면서 경제규모도 2.2배나 확대됐다.그러나 이같은 성장율은 전국평균 성장률 9.3%%보다는 낮은 수준이며 공업화정책이 본궤도에 오르면서 성장격차는 더욱 커진다. 60년대 후반기에는 전국성장률이 12.1%%인데 반해 경북지역은8.7%%에 그치게된다.

또 도내 제조업 전국점유비는 63년 12.9%%(전국 3위)에서 71년에는 5.8%%(전국 7위)로 낮아진다.

도내 금융기관 예금점유비는 61년 8.5%%(20억9천만원). 그후 매년 예금증가율이 60%%이상의 고성장을 기록했음에도 불구 전국점유비는 매년 떨어져 70년에는 6.8%%(5백37억원)를 기록하는데그쳤다.

대출고 점유비도 61년에는 12.6%%(41억1천만원)였으나 제2차 5개년계획이 실시된 67년이후 급격히 낮아져 70년에는 6.2%%(4백44억9천만원)로 떨어졌다.

현재 지역금융의 구조적 문제가 되고있는 지역자금의 역외유출은 66년부터 시작됐다. 이는 근대금융제도가 도입된이후 65년까지 계속되던 '오버 론' 현상이 66년부터 사라진데서 알수있다.즉 65년 예금 62억원에 대출 70억6천만원이던 예대비율은 66년 들어 예금 96억2천만원 대출 93억4천만원으로 역전됐으며 70년에는 5백37억원대 4백44억9천만원으로 심화됐다.그후 이같은 예대수지 적자는 현재까지 계속되고있다.

대구어음교환소의 교환실적은 61년 44만6천매 2백92억원으로 전국의 5.7%%를 기록한뒤 제1차 5개년계획이 끝날때까지 매년 높아져 66년에는 78만9천매 1천6백23억원으로 전국의 7.9%%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67년부터 다시 낮아지기 시작해 70년에는 1백32만7천매 4천2백8억원으로 어음교환 전국비중이 5%%로 떨어졌다.

예금고와 대출고의 전국비중이 60년대 들어 계속 낮아졌음에도 불구, 60년대 전반기 어음교환비중이 높아진 것은 제1차 5개년계획의 실시로 제조업의 비중은 낮아졌지만 지역주종인 섬유산업이활성화된 때문이다.

그러나 60년대후반 들어서는 도로교통망의 발달로 상권중심이 서울로 이동되는 중앙집중화 현상이 심화되면서 지역금융이 상대적으로 침체됐다.

한편 60년대까지는 찾아볼수없던 제2금융권은 대부분 70년대로 넘어가서야 제도화된다.72년 8.3조치이후 사금융의 폐해를 줄이기위해 단기금융업법이 제정되면서 상호신용금고법, 신용협동조합법등이 함께 제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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