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쩍 입동(立冬)도 지나 서라벌 너른 벌에 서면 남산 이골저골을 훑고 땅으로 내려선 늦가을 세찬 바람이 이 땅 사람들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저물녘 갈대너머로 조금씩 제 몸색을 바꿔온 석양이 남산을 안고 스러진다. 쓰러져 여기저기 나뒹구는 석탑의 잔해에도,세월의 힘에 무뎌질때로무뎌진 마애불의 선(線)에도 시간의 음영이 내려앉는다.
산은 그 옛 서라벌사람들이 몸으로,영혼으로 부대껴온 삶이었으나 지금은 뜻모르는 이방인들의눈앞에 동그마니 웅크리고 앉아있을 뿐이다. 하여 침묵의 시간은 길었다. 하나둘씩 녹두빛 석양에물드는 숱한 유물. 새로운 날을 준비하는 또 다른 침묵의 시간이 흐른다.
배리 삼존불에서 칠불암까지 한발짝씩 내딛는 남산. 40여 골짜기를 따라 빛을 기다린 사람들은돌부처의 친근한 미소에 가슴이 벅차다. 비록 옛 모습을 찾을 길 없지만 은은한 달빛에 속내를드러내는 마애불에 세월의 무상마저 간데없다. 그래서 혹자는 한국의 아름다움이 여기에 있다고했을까. 모든 것이 무너져 흔적으로 남아있지만 그 속에서도 억겁의 시간의 무게를 견뎌온 소박한 아름다움이 찾아진다면 또 달리 지극한 아름다움이 있을까. 속좁은 자신보다 자비로운 광명을먼저 기원했던 옛 산. 그 땀과 정성이 배어있는 산이다.
옛 서라벌 사람들은 천지간을 감싸는 태고의 어두움에 두려웠고 시간에의 외경에,역사의 무게에몸을 떨었다. 산은 자연의 빛이었고 그 산은 활활 타오르던 불꽃이었다. 자비를 바라는 마음과 마음이 녹아 깊은 골을 일궈내고 만보(萬寶)를 꽃피운 산이었다. 하지만 산은 세월의 풍화에 그 빛을 잃고 영원에의 시간도 멎어버렸다. 미몽속 고요한 침묵속에 또 다른 수천년. 지금 남산은 어디인가. 게으르고 조심성없는 문명의 발길로 산이 어지럽다. 사람의 땅,지척의 산이 어지럽다.땅과 하늘은 더 이상 하나가 아니고 탐욕과 무자비는 산을 뒤덮었다. 이 땅의 유물들은 더러운발길에 굴욕의 시간을 견뎌어야만 했다. 푸른 빛은 흙빛으로 바뀌었고 숱한 죽음의 그림자가 옛향기를 가리웠다. 산의 참 모습을 해친 것은 이 땅 사람들의 거칠디 거친 영혼이오 정신이었다.부끄러운 얼굴들이었다. 무심한 세월이 아니었다. 앞으로 남은 시간 남산은 어떻게 이 땅의 사람들을 맞이할까.
그러나 이 땅의 사람들이 수천년을 신앙해오던 남산은 아직 그 뿌리마저 거두지 않았다. 풀포기하나 돌조각 하나라도 따뜻한 손으로 거두는 사람들이 있다면 남산의 품은 아직 넓다. 영원을 꿈꾸던 서라벌사람들의 얼굴을 닮은 남산. 자비를 갈구하는 사바세계의 중생들이 애틋한 마음으로바라보았던 남산은 옛 서라벌사람들의 부드러운 음성이자 오늘 우리가 마음으로 새겨야할 교훈의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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