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세제민과 제심합력

또 새로운 한 해를 맞았다.

지난날 새해맞이가 늘 그랬듯이 올 새해도 며칠사이에 만나는 사람마다 주고 받는 판에 박힌 덕 담은 '새해 복많이 받으시라'는 인사다.

굳이 올 새해인사말에서 새로 생겨난 안부인사가 있다면 "IMF 경황중에 그쪽 형편은 어떠시냐" 는 걱정섞인 문안인사.

진지 잡수셨느냐는 일상적인 인사조차도 자칫 직장에서 물러나 밥도 못먹고 있지나 않으냐는 말 로 들려질까 신경이 쓰일만큼 각박하고 불안한 새해 분위기여서 덕담을 나누면서도 마음은 무겁 기만 하다.

세상이 살얼음판 걷듯 조바심나고 불안스러울 때일수록 사람들은 무언가 절대자나 믿을 수 있는 지도자로부터 자신에 찬 다짐이나 희망적인 비전을 약속해주는 메시지를 기다리게 된다고 한다. 집안이 어려우면 가장(家長)이 가정의 꿈과 희망을 제시해주고 식구들을 이끌고 나아갈 길과 비 전을 자신있게 말해줌으로써 안도하고 함께 용기를 가지는 심정과도 같다. 새해의 덕담과 지도자의 신년 메시지는 그런 의미에서 매우 유익한 말의 효능을 가진다. 과거 우리 지도자들도 새해 아침이 되면 신년휘호를 쓰거나 새해의 치국(治國) 덕담을 발표해왔 었다.

박정희 전대통령이 79년 마지막 남긴 새해 휘호는 평범한 근하신년(謹賀新年)이었고 최근 풀려난 전직 두 대통령들은 신뢰와 화합의 새시대를 열자 라든가 국민의 사랑을 받는 대통령이 되고 싶 다는 덕담을 남긴적이 있다.

올해 김대중당선자는 신년휘호를 경세제민(經世濟民)으로 썼고 김영삼대통령은 제심합력(齊心合 力)을 썼다.

두분의 신년휘호를 보면 양쪽모두 국민을 위한 치국의 다짐과 낙담해 있는 민초의 아픔을 쓰다듬 고 씻어주겠다는 덕담의 뜻을 담은 메시지인데도 웬지 '제심합력' 휘호쪽은 가슴에 가까이 닿질 않는 것 같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때 국민의 역량을 모으자'는 휘호의 좋은 뜻을 몰라서라기보다 나라를 이 렇게 산산조각 부숴놓은 쪽이 이제와서 합력(合力)하자며 휘호 한 줄 써보이는 것이 과연 국민들 의 상처난 가슴에 얼마나 절실하게 와닿을 것인가를 생각할때 하릴없는 '낙서'처럼 보여져서다. 차라리 올 새해만큼은 휘호같은것일랑 삼가셨더라면 더 좋았으리라는 심정이 없지않은 것이다. 나라가 위급할때 국민모두의 마음을 합치자는 말은 백번 옳다.

그러나 아직도 휘호를 써들고 국민앞에 나서서 '앞으로!'하면 순진하게 따라와 줄것으로 알고있는 듯한, 바로 그 변하지않은 그분의 모습에서 많은 사람들은 오늘 이나라가 왜 이렇게 될수밖에 없 었던지 그 이유를 새삼 깨닫게 된다.

지도자의 휘호를 고깝게 여긴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의 상황에선 조용히 국민의 아픔을 생각하고 소리없이 자책하며, 비감한 흐느낌으로 국난을 생각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휘호를 써보이는 요란함보다 훨씬 더좋은 모습일 것 같아서다.

가슴에 와닿지도 않는 제심합력 휘호보다는 1월1일 '세계평화의 날' 아침 교황 요한바오로 2세가 내보낸 담화가 오히려 우리의 처지를 감싸주고 용기와 희망을 준 덕담으로 와 닿는다. '가난한 나라의 부채경감을 위해 국제금융기구들이 노력해 주어야 하고 외채문제는 빈곤의 지속 과 세계화 과정에 수반되는 새로운 불평등을 야기시키므로 국제공동체가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해 야 한다'는 담화는 지금 우리 처지에서는 매우 고맙고 좋은 덕담이 아닐수 없다. 좋은 덕담이란 내용이 좋아서 덕담이 되기도 하지만 덕담의 발언자가 존경과 신뢰와 사랑을 받고 있을때 비로소 좋은 덕담이 된다.

'경세제민'과 '제심합력' 두 휘호가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메시지 호소력과 덕담의 무게는 차 이가 있지만 민초들이 나누는 새해의 덕담들과 함께 두 분 휘호의 메시지 뜻만은 모두의 가슴에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기를 바라 본다.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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