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금모아 수출하자는 운동이 우리나라의 대외신인도를 높이고, 국민결속을 다지는 계기를 마련했듯이 대한제국 말기에 지역 여성들이 펼친 국채보상운동은 애국계몽기 여성운동의 성장에 하나의 계기를 마련했다.
대구에서는 1907년 2월23일 대구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가 결성되고 두달 뒤 다시 4월 23일 여성들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뽑아내 나라를 구하자는 '탈환회'(脫環會)가 결성돼 외세의 침략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구하려는 애국운동을 펼치면서 여권의식도 동반 성장시켜 나갔다.'대구 탈환회'는 1907년 4월에 장의근 장모 공씨(孔氏)와 김덕유 조모 엄씨(嚴氏)에 의해 조직됐는데, 국가파멸의 위기의식이 쓰개치마 아래 표정을 감추고, 국가사에 관여한 일이 없던 공씨와 엄씨에게 국권회복을 여성의 힘으로 이룩해야 한다는 새로운 의무감을 부여했고 많은 여성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이들은 한겨레 한동포로서 남녀의 의무와 권리가 동등하다는 주장을 일관되게 펼쳐 자신들을 사회적 존재로 보는 의식을 펼쳐, 개화기 여성운동의 한 장을 개척했다.
"대저 사람은 남녀가 일반이라. 우리는 한국의 여자로 학문에 종사치 못하고, 다만 방적에 골몰하고 사람의 의무를 알지 못하였으나 국채 1천3백만원을 갚고 못갚는데 나라 흥망이 있다니, 아 슬프도다. 국채 1천3백만원이 얼마나 많은지 측량하기 어려우나 갚을 방침은 우리 동포 마음에 있는줄 아니 기쁨을 측량치 못하옵네다"로 시작된 탈환회 취지서(대한매일신보 1907년 4월23일자 잡보에 실림)는 당시 인구 2천만 가운데 여자가 1천만이요, 그중 지환있는 이가 반 넘을 것이오니, 지환 매쌍에 2원씩만 셈해도 여인의 수중에 국채 갚을 방침이 있다고 역설했다.
국채를 갚고 보면 국권회복만이 아니라, 우리 여자의 이름을 세상에 전파, '남녀동권'을 찾을 것이라고 적시한 취지서에는 "여보시오 여보시오 우리 여자 동포님네 '동성일심'하여 때를 잃지말고지환 한번 벗게되면 자유국권 회복하여 독립기초 이루리니 어서 속히 결단하자"고 동참을 호소하고 있다.
여성학자 오숙희씨는 "여성이 국민된 의무를 다하는 능력을 보이면 남녀동등권을 찾을 것이라고하는 것은 남성의 압제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으로서의 해방욕구를 의무의 평등으로 표방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평하였다.
개화기 여성운동의 한장을 펼친 지역여성들의 국채보상운동은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대구 탈환회'에 이어, '국채보상부인회'(1907년 5월, 이진사 첩 문국향)'대구 남산동 국채보상부인회'(1907년6월, 이면주 부인 서주원, 구연목 부인) '경주 흔바위 예수믿는 부인회'(연대 미상, 기독교 부인)등5개 단체가 연달아 결성되면서 가장 가부장적인 이데올로기가 강한 보수 지역에서 가장 활달한국채보상운동을 보여주는 성과를 남겼다.
이처럼 대구 경북지역의 여성국채 보상운동은 국내 첫 여성단체로 서울 북촌 부인중심으로 결성된 찬양회(1898년 9월 창립) 이후 여성의 주체성이 이어지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고, 이 운동으로써 독자적인 여성의 조직 경험과 여성층의 신분적 교체를 이루는 여성운동사상 발전을 남겼다. 또 식민지로 전락하는 국가의 위기상황에서 여성의 역량을 과시함으로써 식민지하 항일독립운동에서 여성의 힘이 필요불가결한 존재로 여기게끔 만들었다.
〈崔美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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