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일본경찰 "기생은 모두 독립투사"

1905년에서 1910년에 걸친 대한(對韓) 식민지화 작업에서 일제는 주로 두가지 방향에서 한국 여성사회에 대한 '변동'을 추진하였다.

하나는 귀족층 부녀들에 대한 일본화 교육이며, 또 하나는 일본의 군국 자본주의 발전에 절대 필요한 생사(生絲) 증산을 위한 양잠 노동력의 확보를 목적으로 일반 대중 부녀에 대한 기술교육의강화와 보급이었다.

이를 위해 일제는 '한일부인회'(韓日婦人會) '자혜부인회'(慈惠婦人會) '자선부인회'(慈善婦人會) '동양애국부인회'등 앞잡이 부녀단체를 동원하여 일본의 식민지화 정책 수행의 필요한 밑그림들을그려나갔다.

당연히 조선여성들의 조직적 '저항'이 따를 수 밖에.

한일합방 이전, 일제의 야욕을 막기위한 대구·경북여성의 저항운동은 여러 형태로 나타났으나가장 큰 흐름은 삽짝문 밖을 모르던 기·미혼 여성들을 가르쳐 조국의 근대화에 동참시키려는 교육 물결이 가장 도도한 흐름을 형성했다. 이 거대한 물결에는 못미치지만 경제적으로 나라를 구하려는 움직임도 좌시할 수 없을 만큼 일렁거렸다.

'대구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나 '대구 국채보상탈환회' '대구단연상채회', 앵무 등 '기생의 국채보상운동'에 이어 1908년 12월에 대구에서 설립된 '대구 대한애국부인회'는 염직회사를 설립하여여성들이 회사경영을 실제 체험케하는 경제활동도 전개하였다.

나라는 빼앗겼어도 민권만은 넘겨주지 말자던 대구상의(초대회장 서상돈)의 분위기와 맞물려 태동했을 대구 대한애국부인회의 염직회사에 대한 기록은 '한국근대여성연구'(숙명여대 아세아문제연구소)에 잠깐 언급돼있을뿐 '대구상의80년사'에는 단한마디도 언급되지 않고 있다.숙명여대 임인영교수(무역학)는 "대구 대한애국부인회의 염직회사 설립이 여성들에게 노동과 실업상의 지식을 가지게하는 일종의 '사회정착운동'(Social Settlement)"이라면서 '부인경제회'(1909년7월) '부인실업상회'(1910년10월) '나주잠업부인회'(1910년) 등이 맥을 잇는다고 논문 '한국근대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사'에서 밝혔다.

서주원(徐周媛) 등이 조직한 대구 대한애국부인회는 순수한 애국부인 단체로 고아원을 경영하였으며 염직회사를 통해 여성에게 실업지식을 주입 터득케했다고 '황성신문' 1910년 7월28일자(사진)에 명시돼있다.

서주원은 이면주 부인으로 구연목 부인과 함께 '남산국채보상부인회'를 결성, 온동네를 다니면서신발이 헐 정도로 모금운동에 열의를 다했던 애국여성이다.

나라를 회생시키는데 관심을 가졌던 또다른 그룹은 대구기생조합을 손꼽을 수 있다. 1910년 5월,대구기생조합은 토론회를 열고 대한제국을 융성케하자면 학문을 일으켜세우는 것(興學·흥학)과군사를 기르는 것(養兵·양병)중에서 어느 것이 먼저인가를 토론의 주제로 내세웠다.여기서 기생들의 사회적인 위상점검을 통해 여성운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따져보자. 3·1운동직후 치안책임을 맡고 부임해온 치바(千葉了)의 말.

"서울의 약 8백명의 기생은 화류계 여자가 아니라 모두 독립투사이며, 시내 백여군데의 요정은모두가 독립운동을 계획하는 소굴이 돼있다. 간혹 일인들이 기생집에 놀러가도 그 태도가 어찌나냉랭한지 이야기도 않고 웃지도 않으며 노래나 춤을 청해도 받아주지도 않는다. 잔을 내밀면 묵묵히 술만 따르고, 때가 되면 묵묵히 사라져 마치 그 분위기는 유령들이 저승에서 술을 마시는기분이다"고 털어놓았다.

명운을 몇달 앞두고 대구기생조합이 판을 벌였던 흥학과 양병논쟁은 경찰력에 의해 강제로 무산됐다.

"부녀자가 정치를 논함은 부덕을 문란케하는 것"이라며 이를 제지, 토론회 자체를 무산시켜버렸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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