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윤기의 세상읽기-익명의 즐거움

프랑스의 한 문학 청년이 파리에 있는 한 극장으로 연극을 보러 갔다. 문학 청년 옆자리에는 한 중년 남자가 앉아 있었다. 중년 남자는 연극구경 대신 시종일관 정신없이 뜨개질만하고 있었다. 이윽고 연극이 끝나자 문학 청년을 비롯한 관중들은 일제히 박수를 보냈다. 박수가 계속되자 처음에는 배우들이, 이어서 연출자까지 무대로 나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뜨개질만 하고 있던 그 사내가 무대를 향하여 야유를 보냈다.

커튼콜 좋아한다. 야, 그것도 연극이냐? 어떤 자식이 썼는지 모르지만 그것도 희곳이라고썼다더냐? 극작가를 끌어내라!

고전주의 연극과 낭만주의 연극이 힘겨루기를 하던 시대였다. 박수부대와 야유부대가 동원되어 저희 동패의 작품에는 환호를, 좌파 작품에는 야유를 보내던 시절이었다. 문학청년은중년 사내를, 좌파의 야유 부대에 속하는 자로 여기고 멱살을 잡고 밖으로 끌어내었다. 그리고는 따졌다.

연극을 열심히 보고나서 야유했다면 이해할 수 있소. 하지만 당신은 내내 뜨개질만 하고있었소. 당신 같은 야유 부대는 용서할 수 없소

그러자 중년 사내가 말했다.

나는 그 작품을 열심히 보고 있을 필요가 없었소. 왜냐? 내가 바로 그 작품의 작가거든. 그렇다면 왜 야유했느냐? 당신 같은 애송이는 모를 거요. 자기자신을 야유하는 이 재미를…이완벽한 익명의 즐거움을 누리는 재미를…

내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면 이 문학청년의 이름은 프랑스의 대중문학사에 큰 발자국을 남긴 알렉산드르 뒤마일 것이다.

미국의 미시간 주립대학교 안에는 '유니버시티 클럽'이라는 레스토랑이 있다. 평일에는정장하고 드나드는 것이 원칙이나 일요일의 브런치(아침 식사를 겸하는 점심식사) 뷔페에는평상복도 허용되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학생들이 드나들 수 있는 레스토랑은 아니기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브런치 뷔페를 고급이라고 할수도 없다. 1994년 초여름, 이 식당의브런치 뷔페에서 청바지 차림의 한 낯익은 중년 사내를 보았다. 젖먹이 세쌍둥이를 실은 유모차를 식탁 옆에다 놓고 젊은 아내와 마주 앉은 그는 미시간의 존 앵글러 주지사였다. 연방정부가 엄연하게 존재하는 미국에서 주지사가 대통령 비슷한 권한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미시건은 미국 자동차 산업의 심장부, 크기로 말하자면 한반도와 크기가 맞먹는다.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의 러닝메이트로도 더러 그 이름이 오르내리는 앵글러 주지사가 어떤 열광적인 지지자들의 방해도, 공권력의 방해도 받지 않고 가족과 오붓하게 점심을 먹는풍경은 그렇게 보기 좋아 보일 수가 없었다.

96년에는 주지사 선거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선거 당시 서울에 들어와 있었다. 앵글러가 재선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그렇거니 했을 뿐, 내 관심은 그의 경쟁 상대에까지는 미치지는 않았다. 금년 4월에 나는 다시 서울에 들어와 있었는데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한 교수 부부가서울을 관광하고 싶어하는데 안내 좀 해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러마고 하고, 서울의 한 호텔에서 수더분한 중년의 교수 부부를 만났다. 하루종일 창덕궁과 종묘와 비원을돌며 남대문 시장을 보여주었다. 신세계 백화점의 한 찻집에서 차를 마시면서 그날 관광의요점을 정리하는 시점에 이르러서야 나는 그 교수가 96년의 주지사 선거에서 지금의 주지사와 싸워서 패배한 민주당 후보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별것도 아닌 자리 차고 앉았다고 자세(藉勢)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문이 곳곳에서 들린다.시의원이 교사에게 차 심부름 시켰다는 것도 우습고, 교원 단체에서 시의원에게 항의한 것도, 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짓이어서 우습다. 팔자에 없는 자리에 앉아 임금 거동 잦은 것을 한탄하던 능참봉 마음을 헤아리자는 것이 아니다. 굳이 이름과 벼슬을 밝혀야 사람들이알아본다면 그건 높은 자리도 아니다. 높은 자리 비스름한 자리에 앉는 재미도 아주 없지않겠지만 익명으로 미복 잠행하는 풍류도 쏠쏠하겠거니와 민정시찰의 호기 또한 될 터인데참 재미없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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