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실직일기-젖먹이 딸업고 술사는 남자

하루는 40대 주부 한분이 우리 수퍼마켓으로 들어와 한참동안 매장을 돌아보았다. 이것저것들어보고 만져보더니 결국 한되짜리 쌀 한봉지만 들고 계산대로 왔다.

"가족이 몇인데 그거 한봉지로 되겠어요?" 별다른 생각없이 웃으며 던진 질문. 하지만 나는금새 의미없이 던진 그 한마디가 아주머니에게 얼마나 상처를 주었는지 깨닫게 됐다."남편이 직장을 잃었어요. 가족이 여섯이나 되지만 당장 돈이 없는데 어떡해요"IMF라는 폭풍이 우리네 삶을 이토록 힘들게 만들 줄 미처 몰랐다. 남편과 함께 시장에서수퍼마켓을 하며 여유는 없지만 생활에 불편함은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는데, 오히려 불경기가 뭐냐며 '줄많이 서는 가게'로 소문났었는데. 하지만 이젠 모든 것이 달라졌다. 주부들의씀씀이가 줄었고 무엇보다 가게를 찾는 손님들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수퍼마켓 계산대에 앉아있다보면 알게모르게 동네사람들의 근황을 훤히 꿰뚫게 된다. 실직한 뒤 아내가 도망가자 매일 밤 젖먹이 딸아이를 들쳐업고 술을 사가는 30대 남자, 자식 용돈이 끊기자 소주 한병 사면서도 손을 떠는 할아버지, 실직한 아들 먹여살리는 60대 부부.예전같으면 여름철 시원한 아이스크림이라도 손님들 손에 들려보내고 보채는 아기에게 사탕이라도 하나 건네주었건만 이제는 무엇하나 쉽지않다.

과자 한봉지 사달란다고 매몰차게 쥐어박고 우는 아이 손목을 끌고 나가는 새댁의 뒷모습을보며, 은근 슬쩍 자루안에 막걸리 한병을 집어넣고는 그냥 지나가는 고물장수 아저씨를 보며 생각에 잠긴다. 무엇이 이토록 저들의 삶을 고달프게 하는 것일까.

묵묵히 일만 하는 착한 서민들을 울리고 모든 이들의 눈시울에 피눈물을 맺히게 한 IMF 제공자들이 한없이 원망스럽다. 하지만 주저앉아 울고 있을 수 만은 없는 일.

이제는 일어서려는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더 이상 줄일 과소비도 없겠지만 한푼이라도아껴야 한다. 실업자가 되어 집안에서 눈치보는 남편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내자. 어색해서접어두었던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도 서슴없이 던져보자. 저녁상에 정성스레 마련한 된장찌게에 무기력하게 잠자고 있던 남편의 용기가 힘찬 파도처럼 다시 일어서리라 믿어본다.〈대구시 북구 관음동 황미양〉

〈실직일기 보낼 곳〉 대구시 중구 계산동2가 71 매일신문사 편집국 경제부. 전화053)251-1738, FAX) 053)255-8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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