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 감독이지만 주로 타지에서 영화를 촬영한 김유영과 달리 이규환은 향토의 정감어린 풍경들을 화면에 담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첫 작품 '임자없는 나룻배'도 화원유원지에서 촬영한 것.
가난으로 인한 가정의 비극과 이 비극이 사회에까지 냉혹하게 파고 든다는 주제로 한국적인 리얼리즘의 극치를 이룬 작품 '무지개'는 지금의 동성로 대구백화점앞 거리에서 제작됐다.
영남.청구영화사, 성봉영화원 등을 대구에 설립, '바다여 말하라' '여로' 등 많은 수작을 남긴 이규환은 일제말 암흑기에 어용영화 제작을 거부하고 노역을 하며 숨어지내다 해방이후 열정적인작품활동을 계속한다.
한때 그와 영화를 같이 만들었던 김대한 예총 대구지회 사무처장은 "이규환 감독은 열악한 제작환경에 굴하지 않고 영화예술은 영혼으로 창조하는 것이라는 신념 하나로 한국영화 중흥에 온 정열을 쏟아부었다"고 회고했다.
일제시대 향토 감독으로 양철과 신경균도 빼놓을 수 없다. 양철 감독은 1931년 대구 녹성키네마제작의 '바다와 싸우는 사람들'을, 1933년 대구영화사 제작의 '종로'를 연출했다.'종로'는 당시 성공작을 내놓지 못하던 나운규가 대구로 내려와 직접 각색.주연을 맡았던 작품.김연실, 임운학 등이 함께 출연했으나 큰 인기는 끌지 못했다고 한다.
경북 선산 출신인 신경균(1912~1981)은 일본 교토 영화연극학교를 나와 1937년 청구영화사 제작의 '순정해협'으로 데뷔했다. 문예월간지 '조광(朝光)'에 연재돼 인기를 모았던 함대훈의 장편소설'순정해협'을 신경균이 직접 각색, 메가폰을 잡은 작품. 미모의 여교사를 사이에 두고 대학생과남자교사가 벌이는 삼각관계를 통해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랑의 지조를 지킬줄 아는 순정임을 강조했다.
이 작품은 영화계에 커다란 파문을 던졌다. 당시 영화평론가들은 세련된 연출, 대담한 영상 등을보여준 신경균을 가장 새로운 스타일의 신예 감독이라고 평했다. 작가적 열의가 대단했던 신경균에 대해 당시 이규환은 적지 않은 경쟁의식을 느꼈다고 전해진다.
신경균은 '새로운 맹세' '노들강변' 등 30여편의 작품을 남겼다. 그의 아들 옥현도 현재 촬영기사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 '테러리스트' 등 영화를 촬영하고 있다.
〈金英修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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