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선과 공간 한국건축의 미학-(6)수원화성

수원 화성(華城)은 조선후기 성곽 건축의 최대걸작으로 97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조선조 정조 20년(1796년)에 완성된 화성은 당시 새로운 시대흐름을 반영한 건축물로 지난 200년동안 완형을 유지하며 현대인의 일상과 가까이 살아 숨쉬는 유산. 화성은 정조(正祖 1751~1800)의명에 의해 조성된 신도시이자 도시 외곽을 감싸는 성곽의 호칭이기도하다.

정조가 화성을 쌓은 배경에는 많은 이유가 깔려있다. 먼저 양주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명당지인 수원읍의 주산인 화산(花山)으로 옮기면서 당시 2천여명의 주민이 살던 수원읍 전체를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명한다.

1789년의 일이다. 읍을 북쪽으로 5km정도 떨어진 팔달산 아래로 옮기면서 관청건물과 향교를 짓고 그후 도시주변을 둘러싸는 성곽을 축조한 것이다. 두번째는 정치경제적 이유다. 당시 벽파와시파의 권력다툼속에 약화된 왕권을 되찾기위해 정조는 왕의 권력을 지원하는 배후도시를 건설하려했다.

18세기후반 조선사회에는 뚜렷한 구조적 변화가 일게 된다. 농업에만 의존하던 경제구조에서 점차 상업의 비중이 커졌고 엄격히 구분된 신분제도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또 많은 학자들도 철학적 논쟁대신 백성의 현실생활속에서 학문의 실천과제를 찾으려는 실학(實學)에 비중을 두게된다. 이 때문에 정조는 왕권강화를 위해 상업이 흥한 신도시를 배후도시로 건설함으로써 18세기가 요구하는 진보된 도시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결국 화성은 새 시대를 열어가려는 한 진취적인 군주와 새로운 학문을 숭상하는 학자들의 힘이합쳐져 이뤄진 결과다.

정조는 화성축성과 동시에 행궁(行宮)도 완성했다. 이 행궁은 부왕의 능인 융릉(隆陵)행차시 머무는 임시처소로 당시 수원부의 읍치(관아건물)를 확장, 증축해 조성했다. 전체 약 570칸이나 되는대규모 건물로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화성의 공사과정을 낱낱이 적은 일종의 공사결과보고서인'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당시 공사와 관련된 사실들이 방대하게 기록돼 있어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수원 화성의 전체 성벽길이는 5.4㎞로 서쪽 팔달산 정상에서 크게 타원을 그리며 도시 중심부를감싸는 형태로 되어있다.

성벽에는 거의 100m간격으로 치성(雉城)이라는 돌출부가 있는데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공격할수 있는 시설로 이전에는 거의 없던 새로운 구조다. 성벽높이는 4~6m로 지형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평균 5m내외이며 성벽위에 높이 1~1.2m정도의 여장(女檣·몸을 숨겨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수 있는 틈새가 있는 낮은 담)을 쌓고 여러개의 총구멍을 뚫어 놓았다. 성벽은 위로 올라가면서배가 안으로 들어간 형태인 규형(圭形)이다.

화성의 성벽은 기본적으로 밖에는 높은 성벽을 쌓고 안에는 흙으로 여장높이의 버팀벽을 쌓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은 성벽 안팎을 모두 돌로 쌓는 것에 비해 효율적이고 내부에서 밖을 쉽게 살필 수 있는 이점이 있다.

화성 성벽축성에 사용된 재료는 원칙적으로 석재지만 전돌(벽돌)을 많이 활용한 것도 특징으로손꼽힌다. 건축재료로 벽돌을 사용한 것은 삼국시대부터로 건물바닥에 깔거나 담장을 쌓는 정도의 부재료에 불과했다.

16, 17세기부터 목재의 기근현상이 심해지면서 일부 실학자들은 그 해결방안으로 벽돌의 사용을적극 주장했다. 따라서 화성은 이들의 주장이 본격적으로 실현된 첫 성과라 할 수 있다.화성에는 축성당시와 마찬가지로 현재 동서남북 방향으로 4개의 성문이 남아있다. 남북간선대로를 연결하는 북쪽의 장안문(長安門)과 반대쪽의 팔달문(八達門)은 큰 문이고 동쪽의 창룡문(蒼龍門)과 서쪽의 화서문(華西門)은 다른 도로와 연결되는 작은 규모의 문이다.

또 성벽위에는 성주변 사방을 조망하며 군사를 지휘하는 장대(將臺)와 대포를 설치한 포루(砲樓),단순히 누각만 올린 포루(鋪樓)가 있고 성벽 네모서리에 세운 각루(角樓)와 봉수대인 봉루, 사람이 안에서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든 높은 망루인 공심돈(空心墩)등 많은 시설이 남아 있다.화성의 성곽 건축은 독특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팔달문은 조선시대 건축의 미적 전통을 계승한 대표적 건축물이며 내부계단이 나선형이어서 소라각으로도 불리는 공심돈은 화성에서 가장 특이한 건물로 새로운 조형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북수문위에 세워진 누각인 화홍문(華虹門)과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은 이 두가지 특성을 하나의 건물에 완성시킨 화성의 대표적 건물로 손꼽힌다.

경기대 건축과 김동욱교수(경기도 문화재위원)는 "화성은 정약용으로 대표되는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연구와 노력에 의해 이뤄진 큰 성과물"이라며 "그 배경에는 백성의 주거생활과 노동조건을개선하려는 실학의 위민사상이 깔려 있다"고 규정했다.

다음 시대를 예비하는 새로운 건축의 가능성을 보여준 화성. 미래를 향한 실험적 건축정신과 조선시대 건축이 오랜 시간 다듬어온 미적 전통을 담아낸 우리 건축의 또 다른 이정표다.〈徐琮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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