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1세기를 향해(10)

'갓쟁이 헌 갓 쓴다'는 말이 있다.

남의 일은 잘 봐주면서도 제 일은 잘 처리하지 못하는 경우나, 노동자들이 땀흘려 만들어낸 생산품을 스스로 향유하지 못하는 소외 현상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어느 쪽이든 사람과 일, 또는생산물 사이의 모순을 지적한다.

모순의 원인은 일과 생산품을 꼬박꼬박 상품화하는데서 비롯된다. 21세기 문화는 이 모순을 반성적으로 인식하고 극복하는데서 출발해야 한다. 자신이 자신의 일과 삶의 주인 노릇을 할 수 있어서 갓쟁이야말로 번듯한 새 갓을 쓸 수 있어야 진정한 문화의 세기가 열린다.

사람들은 21세기를 문화의 세기라고 곧잘 말하면서 문화의 주체인 사람을 문화로부터 소외시키고문화를 경제에 종속시킨다. 그러면서도 21세기를 문화산업의 세기나 문화상품의 시대로 환원시켜인식하고 있기 일쑤이다.

자연히 문화의 세기에 대한 전망도 여전히 상업자본주의가 빚어낸 20세기적 물신화 상황에 매몰된 채로다.

문화산업의 전략이나 문화상품 개발에 골몰하여 엉뚱한 문화상업 시대를 꿈꾼다. 경제 논리에 따라 문화를 상품으로 거래하는 한, 사람들은 20세기 문화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문화기술자와 문화장사꾼이 문화를 독점하게 되어 문화민주주의는 더욱 멀어지게 된다.

자본이 주인되는 문화가 아니라, 사람이 주인되는 문화로 가꾸어나가야 문화 창조력이 인간답게활성화될 수 있다. 민주주의가 지방자치제에서 꽃 피울 수 있듯이, 문화의 민주주의도 지방자치제로 나아가야 발전할 수 있다.

문화는 정치보다 더 진보적이고 더 민주적이어야 하는데, 우리 문화는 아직도 중앙집권적 전근대성을 지니고 있다. 이런 구조를 역전시켜 중앙문화로부터 지역문화의 독자성을 회복하고 문화자치를 성취해야 문화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다.

문화는 사람을 줏대있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다운 삶의 수준을 확보해주고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삶의 주인이 되는 '삶의 질'을 문화가 담보해내야 한다.

경제와 기술은 남을 잘만 따라가면 2등도 할 수 있으나 문화는 남을 따라가면 잘 따라갈수록 문제다.

독창성이 없는 문화는 꼭두각시 문화이자 죽은 문화이기 때문이다. 남을 따라할수록 전통적 독창성을 죽이고 주체적 창조력을 잃게 된다. 저마다 줏대있는 문화를 통해서 민족문화의 정체성을새롭게 만들어가야 세계문화도 역동성을 지니며 발전할 수 있다.

줏대있는 문화는 모방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성과 특화에 있다. 민족문화로서 독자성은 물론,다양한 지역문화가 독자적으로 창출되어야 한다.

문화자치가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20세기는 도시화 시대이자 국가화 시대였다면 21세기는 지방화 시대이자 세계화 시대이다.

국가의 범주를 뛰어넘어서 지방과 지방, 지방과 국가, 지방과 세계가 한 동아리로 얽혀 세방화(glocalization)의 지구촌을 이룬다. 이러한 시대일수록 지역 단위의 문화적 독창성을 확보해야 한다.

지역의 문화적 줏대는 공동체문화에서 담보된다. 온전한 공동체문화는 남녀별, 세대별, 계층별로다양한 문화가 서로 인정되면서 더불어 공존해야 하며 문화적 전통성이 지속적으로 계승되어야한다.

다양한 특수성들이 횡적으로 서로 어울리고 지역의 전통문화가 종적으로 이어져야 새로운 문화를창조하되 낯설지 않고 전통성을 살리되 진부하지 않다. 문화적 다양성은 문화의 역동적 창조력을부추기고 문화적 전통은 문화의 주체적 동질성을 확보해 주는 까닭에 항상 새로우면서도 익숙한공동체문화를 줏대있게 만들어 갈 수 있다.

그러자면 먼저 문화인이 문화의 주인이 되고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문화의 주체가 되어야한다. 행정가 문화, 관변측 문화 행사가 아니라 문화인 문화, 문화 전문가 문화 행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행정가와 관청이 주도하는 관치문화에서 벗어나야 문화 전문가와 문화단체가 주도하는 주민 위주의 시민문화를 일구어낼 수 있다.

그러나 문화 전문가 문화는 문화 기득권층의 문화 향수를 전제로 하게 되어, 문화의 고급화는 이룰 수 있되 민중을 소외시키는 반민주적 문화로 전락할 위험성도 있다. 그러므로 문화 기득권층에 의한 문화독점주의와 예술문화의 함정에서 해방되어 문화 향유층에 의한 열린 문화를 구상하고 시민들의 일상생활 문화를 증진시켜야 21세기를 진정한 문화의 세기인 문화복지 시대로 발전시킬 수 있다.

문화 전문가들에 의한 문화 행사조차 관변측 인사들의 개입으로 장벽에 부딪치기 일쑤인 상황에서 문화전문가도 아닌 예사 시민들이 주체가 되는 일상문화의 증진은 문화 기득권자들의 독점욕때문에 더욱 실현하기 어렵다.

따라서 문화인 스스로 시민들과 더불어 문화를 공유할 수 있도록 시민생활속으로 파고드는 운동을 실천해야 하며 시민들은 이를 위해 문화운동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문화행정 또한 문화인의 문화활동보다 시민을 위한 문화인의 문화봉사활동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

이것이 문화민주주의를 넘어서 시민들의 문화복지를 실제로 보장하는 길이다. 자체적인 시민문화운동과 문화생산자를 겨냥한 문화 소비자운동이 함께 활성화되어야 한다.

시민문화운동은 문화복지 차원에서 머물 수 없다. 사람들의 삶만 푸지게 만드는 문화는 지속 불가능하다. 20세기 산업문화가 빚어놓은 자연정복적인 문화를 청산하지 않으면 21세기 문화는 커녕 지구촌 자체의 존립이 위태롭기 때문이다.

따라서 21세기 문화는 인간과 자연이 함께 하는 자연친화적 문화를 생활화해야 한다. 저마다 자기 생활속에서 녹색문화를 일구어 가는 공생운동의 실천이 21세기 문화를 지속 가능하게 하는 가장 확실한 전망이다.

녹색문화의 세계에서는 갓쟁이도 가끔씩 헌 갓을 써야 한다. 공생의 논리에서 문화복지는 자연생태계를 고려하여 인간의 문화적 향수도 상당부분 양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갓쟁이조차 번듯한 새갓을 탐하지 않는 것이 21세기의 지구를 살리는 자연친화적 대안문화이다. 갓으로부터 소외된 갓쟁이가 아니라 갓을 아끼며 지속적으로 누릴 줄 아는 인간이 진정한 갓문화의 주인이 되는 21세기의 문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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