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세기 문화-중국의 혼 루쉰

20세기초, 거대한 중국대륙이 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해 갈갈이 찢겨졌던 암흑기에 잠든 중국민중을 일깨우기 위해 혼신의 열정을 살랐던 사람. 문학가이자 사상가이며, 압박받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쳤던 시대의 양심.

루쉰(魯迅·1881~1936).

청(靑)나라 꽝쉬(光緖) 7년, 중국남부 저쟝(浙江)성 샤오싱(紹興)현에서 태어났다. 원래의 성은 쩌우(周), 이름은 수런(樹人). 필명인 루쉰의 루(魯)는 어머니의 성이다.

글을 가까이하는 지주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과거시험장 사건으로 인한 할아버지의 옥살이, 아버지의 오랜 병 등으로 집안이 몰락했다.

'신식학교에서 서양글을 배우는 것은 영혼을 외국놈들에게 팔아먹는 것'이며 '글공부를 하여 과거를 보는 것이 바른 길'로 여겨졌던 그 시절. 루쉰도 처음엔 마을 서당에서 글을 익혔다. 부패한 청(靑)왕조에 맞선 진보적인 변법유신운동이 고조되던 1898년, 18세의 루쉰은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난징(南京)의 강남수사학당에 입학했다. 20세때는 역시 난징의 강남육사학당 부설 광무철도학당에 들어가 광산기술을 배웠다. 그러다 22세때 일본유학생에 선발돼 도쿄(東京)에서 공부하다 1904년엔 센다이(仙臺)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의학도 루쉰은 이국땅에서 스러져가는 조국을 보며 뜨거운 사랑으로 가슴을 불태웠다. 친구에게 보낸 당시 루쉰의 사진 뒷면엔 이런 칠언절구가 적혀 있다.

'내 마음 큐피드의 화살 피할 길 없는데/ 비바람이 검은 장막처럼 조국을 뒤덮었네. /찬 별에 부치는 나의 뜻 향초는 몰라주어도/ 사랑하는 조국에 붉은 피를 바치리!'조국과 민족을 향한 애국청년 루쉰의 최초의 맹세였다.

의사가 되기 원했던 루쉰이 도중에 문학으로 방향을 바꾼 것은 우연한 계기때문이었다. 어느날 학교에서 러일전쟁의 일본군 전적을 선전하는 영화에서 러시아를 위해 정탐한 죄로 사형을 당하는 한 중국인을 얼빠진 모습의 중국인들이 빙 둘러서서 구경하는 장면을 봤다. 일본인 동급생들은 박수를 치며 환성을 올렸지만 루쉰은 큰 충격을 받았다. 동족이 학살당하는 것을 어떻게 무감각하게 구경할 수만 있단 말인가?

서양의학을 배워 나라를 구하겠다던 루쉰의 환상은 깨어졌다. 어리석은 국민은 제아무리 몸이 건강해도 놀림감이 되거나 구경꾼이 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중국민중의 의식개조야말로 시급한 문제이며, 문학은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판단했다. 마침내 의사의 길을 포기한 루쉰은 의아해하는 친구에게 말했다. "그래, 자넨 중국의 바보들, 백치들을 의술로 고쳐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1906년 도쿄로 되돌아간 루쉰은 중국유학생들과 함께 혁명적 문학활동에 뛰어들었다. 부패한 정부관리 언밍(銀銘)을 암살한 쉬시린(徐錫麟)의 심장을 언밍의 호위병들이 볶아먹었다는 소식과 목잘린 여성혁명당원의 나신을 구경하기 위해 떼지어 몰려가는 중국군중들의 모습은 루쉰으로 하여금 분노에 떨게 만들었다. 루쉰은 반청(反靑)성격의 혁명적 간행물인 '허난(河南)'등을 통해 중국민중의 정신세계에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그러다 일본에서의 문학활동의 한계와 고향 가족들의 생활고로 일자리를 찾아야했던 루쉰은 1909년 귀국, 교사가 돼 청소년들의 의식개조에 열중했다.

1911년 마침내 신해혁명으로 청(靑)정부가 무너졌지만 제국주의와 봉건주의적 억압과 착취는 여전했다.

신해혁명의 실패로 실망감에 차있던 어느날 잡지'신청년(新靑年)'의 편집자인 친구가 루쉰을 찾아와 글을 쓰보라고 격려했다. '창문이 하나도 없는 무쇠방(중국의 절망적인 현실)'에서도 한가닥 희망을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한 루쉰은 다시 그의 무기-붓을 들기로 결단했다.

1918년 마침내 루쉰은 그의 첫 단편소설 '광인일기(狂人日記)'를 신청년에 발표했다. 한 미친 사람에 대한 묘사를 통해 수천년 지속돼온 봉건가족제도와 위선에 찬 도덕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가속도가 더해진 루쉰의 붓은 낡은 시대 몰락한 지식인을 그린 '공을기(孔乙己)', '고향', '약' 등의 단편소설을 잇따라 발표했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중편소설'아큐정전(阿Q正傳)'은 1921년 발표됐다.

무력하고 비겁하고 몽매하면서도 자기보다 약한 자를 괴롭히고 자기기만으로 자아도취에 빠지는 주인공 阿Q는 바로 중국인의 모습이었다.

가난하고 무지한 과부가 봉건윤리의 희생물이 돼 결국 죽음의 비극에 이르는 '복을 비는 제사', 부당하게 이혼당한 여인이 용감하게 자기주장을 하지만 결국 봉건사회의 권위에 굴복당하는 '이혼'등 중국의 현실을 폭로하고 잠든 의식을 깨우기 위해 밤낮없이 붓을 들었다.

1923년엔 첫소설집 '납함', 26년엔 두번째 소설집 '방황', 35년엔 세번째 소설집 '고사신편(故事新編)'이 출간됐다.

56년간의 일생동안 루쉰은 상상을 초월하는 방대한 양의 글을 남겼다. 소설집 3권, 산문회고록 1권, 산문시 1권이 모두 약35만자, 잡문 16권이 약 650여편 135만자, 중국고전문학 연구저작물이 약80만자, 외국현대작가들의 작품번역이 장편, 중편소설, 동화 9권, 단편소설과 동화 78편, 희곡2권, 문예이론저서 8권, 단편논문 50편 등 모두 310여만자에 이른다.

암울한 중국 근대사의 한복판을 걸어간 그의 생애는 '전투적 지식인의 초상'이었다. 정직하고도 준엄한 그의 글은 위선과 허구, 무지몽매함을 가차없이 들추어냈으며, 조국과 민중에 대한 고뇌와 애증을 스스로 피를 흘리며 껴안았다.

붓 한자루로 봉건사회와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정책에 맞섰던 '중국의 혼(魂)' 루쉰은 침식을 잊은 창작생활로 건강이 악화, 1936년 폐병으로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조국과 민중의 곁을 영원히 떠났다. 유언장을 대신해 집필한 죽음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장례때는 옛친구이외엔 아무한테서도 절대로 돈을 받지 말라. 빨리 묻어버리고 끝내기 바란다. 추도식은 절대로 하지 마라. 나를 잊어버리고 너희들의 일이나 잘 보살펴라. 그렇지 않다면 너희들은 어리석다'

〈全敬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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